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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연무동'과 '쑥고개'의 문인 박석수 형을 추억하다
김우영 언론인
2023-03-03 15:23:16최종 업데이트 : 2023-03-03 15:22:53 작성자 :   e수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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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박석수기념사업회 회장인 우대식 시인이 사업회에서 발행한 세 번째 박석수문학전집 '차표 한 장'을 보내왔다.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추억이 쌓인 거리를 걷기 위해 송탄행 전철을 탔다. 마침 수원역 근처에서 독서광이자 영화광인 ㄱ기자를 만나 동행했다. 마침 그도 얼마 전 '차표 한 장'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송탄에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갔지만 미군부대 앞 옛 도심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미군들이 떠들썩하게 활보하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골목의 가게들도 여전했다. 그날은 날이 추워서 사람이 뜸했지만 주말엔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관광 명소라고 한다.

 

 

송탄과의 인연은 박석수 시인으로부터 비롯됐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1949년생이다. 나보다는 여덟 살 많고 수원북중 선배이기도 하다. 송탄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수원에서 보냈고 수원북중과 수원삼일상고를 졸업했다. 신혼살림도 수원에 차렸다. 그러니 절반은 수원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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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에게 남아있는 박석수 관련 자료들(사진/김우영)

 

박석수 시인은 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술래의 잠'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1981년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당신은 이제 푹 쉬어야 합니다'가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재등단했다.

 

그동안 시집으로 '술래의 노래' '방화' '쑥고개'를, 소설집으로 '쑥고개' '철조망 속 휘파람' '로보의 달' '우렁이와 거머리' '차표 한 장', 콩트집으로 '독안에 든 쥐' '소설 이외수', 르포집으로 '흩어져 사는 32명의 주민등록' 등을 펴냈다.

 

 

그와 만난 것은 1974년이었다. 현재 권선보건소가 있는 자리에 있던 허름한 2층 목조건물이 수원문화원이었는데 그곳 '싸롱'에서 그의 시화전이 열렸다. 문학소년이었던 나에게 그의 시는 충격이었다.

 

 

일곱살의 골목에는 야도를 찍어내는/두려움이 와아 와아 햇살처럼 쏟아지고/스무살 이후의 도시는 대패날이 되어 나를 문지르고 있었다....(중략)...갈증을 뜯는 기억의 바다/더듬거리는 스무살을 소리치다가 치다가/찢어진 냄새여, 숨찬 야도여./빌딩 사이에서 방황하는/내계(內界)의 노오란 잠은/험준한 산맥을 넘어온 밤바람을 만난다./만나는 손바닥./악수의 안에서 눈뜨는/가롯 유다의 야도소리.//귓속을 웅웅대는 우수의 빛깔을 끌어내/내가 완전한 자유를 깁고 있을 때/내 생애는 난이와 눈맞추고/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찾는다-//환각의 다리에 물구나무선 나의 일곱 살/호주머니에서 쏟아지는 천진한 기침을 숨었던 이마들은 변명하고/나는 자꾸 목이 말랐다...(하략)

 

 

시화전에서 만난 박석수 시인은 내게 수원에 좋은 선배님이 계시다며 임병호 시인을 소개해줬다. 그 후 임병호 시인은 나의 의형이 됐고 우정은 50년 가까지 변치 않은 채 이어져 오고 있다. 다만 박석수 시인은 1996년 참 아까운 나이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박석수 시인이 가장 좋아하던 시인은 임병호 시인이었다.

 
 

"1971년 1월1일 오전이었다. 한동안 모습을 안 보이던 박석수가 남수동 우리 집엘 왔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필자는 '무슨 사고를 쳤나' 하고 내심 걱정했는데 선량하게 씩 웃으며 종이봉투에서 4홉들이 소주 세 병과 신문을 슬그머니 꺼내 놓았다. 신춘문예 당선작품 '술래의 잠'이 실린 대한일보였다. 우선 박석수가 사온 오징어를 안주로 소주부터 비우고 집을 나가 선지국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신춘문예 당선의 기쁨을 만끽했다." 생전의 박석수-임병호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막역한 관계였다.

 

 

박석수 시인 스스로 임병호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을' 발문에서 고백했다. "수원에서 학생깡패로 이름깨나 날려 매일 싸움박질만 하고 다녔"고, "상처입은 짐승처럼 늘 으르렁댔고,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두들겨 팼으며, 교복을 입은 채 술을 엉망으로 마셔댔"던 그를 임병호 시인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건너다보기만 했다. '짜식'하면서."

 

임병호 시인은 박석수 시인의 둘도 없는 형이자 친구였을 것이다.

 

박석수 시인의 주먹맛은 나도 본적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임병호 시인 생일 날 술자리에서 바락바락 대들다가 몇 대 얻어 터졌는데 주먹이 매웠다. 십몇 년이 흐른 뒤에 만났다. "그때 넌 유단자였다면서 왜 맞기만 하고 있었느냐"는 그의 말에 웃음이 났다. 당시 하늘같은 선배였는데 어떻게 맞주먹질을...

 

​박석수는 시와 소설을 퉁해 고향 송탄과 수원 연무동, 특히 송탄의 미군기지와 기지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뛰어난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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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석수 기념사업회 창립식에 참석한 사람들.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안양의 김대규 시인,
수원의 임병호 시인과 나도 참석해 고인을 회고했다.(사진/박석수 기념사업회 제공)

 

박석수가 타계한 지 21년 만인 2017년 평택에서는 박석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그때 사업회를 진두지휘하던 그의 동갑내기 이성재 형도 세상을 떠났다. 사업회 창립식 때 오셨던 안양의 김대규 시인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손짓, 발짓, 이마의 힘줄까지 쥐어뜯으며" 작품을 썼고, 소설문학, 직장인 등 잡지 편집장과 도서출판 한겨레 주간을 역임하는 등 열심히 살다 간 박석수를 기억하고 그의 문학적 성과를 알리려는 고향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다. 날이 풀리면 그의 송탄생가 근처나 연무동 대폿집에 앉아 옛일을 추억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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