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농대 서둔 야학당, 자취를 찾아서
65-83학번들의 열정 흔적 남아 있어
2015-06-27 22:16:30최종 업데이트 : 2015-06-27 22:16:30 작성자 : 시민기자 이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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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울림이 더 큰 감동을 준다고 했던가. 그렇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울려야만 신문기사감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 서둔동에 가면 옛 서울대 농대 자리에 야학을 열었던 유적지가 있다며, 그런 유적지가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에 하나뿐일 것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서울농대 서둔 야학당, 자취를 찾아서_1 가축들의 사료를 저장했던 사일로와 함께 우사를 비롯하여 진입로 양쪽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었지만 나간 집 그대로였다. 마치 주인 없는 집 침입자처럼 두리번거리며 얼마를 더 들어가자, 한 건물에서 인기척과 함께 기계를 수리하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일단은 물어봐야만 하겠기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밖으로 나가서 울타리를 따라 돌아가면 된다고 했다. 그러려면 왜 여기까지 들어왔겠는가, 아니라며 안에서 자세히 보려고 들어왔다고 말하자 난색을 짓더니 마지못해 방향을 일러준다. 건물들을 벗어나 아래로 내려오니 넓은 들판 같은 그곳, 전에 같았으면 사료작물들을 심었겠지만 황무지가 된 가운데 개망초가 만발하여 마치 강원도 봉평의 메밀밭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가다보니 길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우거진 수풀만 보이며 들어가더라도 더는 볼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단 하나 있다면 숲속으로 보이는 쓰러져가는 슬레이트지붕 한 채 뿐이었다.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곳을 나온 뒤 울타리 밖을 따라서 돌아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은 다니지 않고 자동차만 가끔씩 지나갈 뿐인 그길, 마침내 안내판 하나가 보였다. 그러나 울타리 안으로는 숲에 가려져 안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이런 곳에 간판만 유적지라며 서있는가 싶었다. 안에서 바라다보던 낡은 집 한 채와 혹여 관계가 있다면 그곳 옆에 있어야 하겠지만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서울농대 서둔 야학당, 자취를 찾아서_2 유적지 표지판의 내용은 그랬다. '서둔야학 유적지' 이곳은 1965년부터 1983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대학과 수의과대학의 학생들이 수원 서부지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서둔야학은 54년 서둔교회에서 설립한 성경구락부를 모체로 하여 탑동마을회관, 농사원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하다가 1965년 당시 학생이었던 황건식 등의 야학 교사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이곳 부지를 구입하여 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으며, 책상과 걸상을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였고, 매년 10-2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중등 반을 운영하였다. 상록수정신을 계승한 야학교사와 졸업생들은 현재 서둔야학회를 설립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사회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서둔야학회에서 서둔야학사를 발간하게 됨에 따라 이를 기념하고 당시의 학생활동을 기리는 뜻으로 여기 이 표지판을 세운다. 2000년 6월 일.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장. 상상은 가지만 사진이 부족하고 도무지 기사감이 나오지를 않았다. 할 수 없이 그곳을 알려준 지인에게 다녀온 상황을 설명하였더니 날더러 맹추라며, 그래가지고 기자해먹겠냐고 한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가 바로 유적이라는 것이다. 더 적극적이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길이 없다고 그냥 돌아설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찾아간 자리였는데, 문득 차봉규선생님의 6,25관련기사 쓰실 때 사진 구하기 어려운 점에 대한 체험고백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용기백배하여 달려간 것이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헤치며 6,25전쟁 때의 국군용사처럼, 시인들은 시를 쓸 때 시마가 걸린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어쨌거나 땡볕아래 미치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았다. 낮도깨비라도 당장 나올 것만 같은 험상궂은 폐가에 뭐가 볼 것 있다고! 그러나 오래된 친구처럼 무섭지도 않으며 오히려 반가웠다. 서울농대 서둔 야학당, 자취를 찾아서_3 서울농대 서둔 야학당, 자취를 찾아서_4 겨울에 폐교가 된 듯 처마 밑의 벽에는 연탄난로의 함석연통이 그대로 꽂혀있고, 떨어져 나간 방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이 너풀거리며 온갖 잡동사니들로 어지러웠다. 그러나 한 시절 이곳에서 젊은 그들이 가난을 딛고 배움에 목말라하며 열정을 불태웠을 것을 생각하니, 그 숨결이라도 들려올 것 만 같이 가슴이 뜨거워왔다. '시대가 젊음을 부르고 젊음은 시대를 거역하지 않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애썼던 흔적이다.'라며 당시 이곳에서 야학교사로 참여했던 한 인사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또 이곳에서 학생들을 만났고, 밤늦게 끝나는 일정이라 학생들하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평동으로, 고색동으로, 더 멀리는 화서까지, 집까지 바래다주던 추억들이 생생하다고 자신의 글을 통해 세상에 전하고 있었다. 또 서둔 야학교 교가를 보면 '펼쳐진 서둔 벌 바라보면서, 땀 흘려 일해 나가는 푸른 정신을 겨레의 보람이라 가슴에 새겨, 어린 우리 배움은 끝이 없구나, 살기 좋은 조국 이 강산 일꾼 되고자, 힘써 배우고 힘써 일하는 서둔의 학원' 이런 상록수의 푸른 갈증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무대가 옛 서울농대였다는 것에 의미가 더 크게 전해오며, 그날의 모습들이 자꾸만 눈앞에서 서성거렸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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