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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엔 창성사지도 있고 서봉사지도 있어요
보물 제9호 현오국사 탑비를 찾아가다
2015-04-08 20:09:20최종 업데이트 : 2015-04-08 20:09:20 작성자 : 시민기자   하주성
광교산엔 창성사지도 있고 서봉사지도 있어요 _1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소재한 서봉사지
 
비가 올 것 같이 하늘이 잔뜩 흐렸다. 그동안 한 번 찾아가야지 하고 늘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광교산 서봉사지를 찾으러 길을 나섰다. 서봉사지에는 보물 제9호인 '서봉사지 현오국사 탑비'가 있기 때문이다. 오전에 출발을 했으면 수원 광교산으로 오르기 시작해 산을 넘어 서봉사지를 찾아갔을 테지만, 점심을 먹고 출발했기 때문에 바로 용인으로 향했다.

서봉사지는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1번지에 소재한다. 신봉동 음식점들이 즐비한 길을 지나 광교산 방향으로 들어가니, 깊은 곳까지 식당이며 커피숍들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임시로 닦아 놓은 듯한 주차장 앞에서 차를 내려 등산로를 따라 오르려니, 서봉사지가 600m 앞에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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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각 안에 들어 있는 서봉사지 현오국사 탑비
 
창건연대를 알 수 없는 서봉사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보니 계절이 봄이라서 인가 연두색 잎을 단 나무들이 한결 시원해 보인다. 오르는 등산로에는 곳곳에 이정표를 세워놓아 초행길인 사람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길에는 한 옆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광교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그저 손으로 떠서 마셔도 좋을 만큼 맑다.

그리 오래 오르지 않았는데 길가에 돌탑이 보인다. 바로 서봉사지로 오르는 길목이다. 서봉사는 창건연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절터는 발굴중인 듯 접근금지라고 적인 푯말을 달아놓았다. 안전선 안에 무너져 내릴 듯한 축대를 보니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오국사 탑비는 전각을 세워 그 안에 보존을 하고 있다.

현재 서봉사지는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다고 한다. 서봉사지는 금당터를 비롯해 10여 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서봉사는 큰 절이었다는 것이다. 현오국사는 고려 명종 15년인 1185년에 남긴 탑비로 보아 고려 중기의 승려인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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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돌의 위는 양편을 깎아 마름모꼴로 구성했다
 
마모된 비문은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어

현오국사 종린(1127~1179)의 출가 이전의 성은 왕(王)씨였다. 이름은 중지로 기개와 도량이 뛰어났다고 한다. 13세 때 출가하여 인종 19년인 1141년 불일사에서 계를 받고, 의종 즉위년인 1146년 이후 수좌(국사의 높임말)가 되어 귀신사와 국태사, 부석사 등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그 후 승통이 되어 법문을 이끌었으며 명종 원년인 1171년에 왕에게 가사를 하사받았다. 명종 8년 53세의 나이로 입적에 들었다. 명종은 현오국사가 입적을 하자 국사로 추증하고 현오라는 시호를 내렸다. 마모가 심해 제대로 알아보기조차 힘든 비문은 아래쪽 일부가 탈락이 되었다.

현오국사의 탑비의 비문은 이지명이 지었고, 글씨는 유공권이 썼다. 비는 높이 1.88m에 너비 0.97m인 점판암을 사용했으며, 받침돌은 화강암이다. 비의 상부부분은 모서리를 깎아서 마름모꼴로 하였으며, 사각형의 대석도 간단하게 하여 12세기 말 이후 고려 석비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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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앞(좌)과 뒤(우). 글씨가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 힘들다
 
비를 찬찬히 돌아본 후 앞산을 내다본다. 높지 않은 산봉우리가 걸쳐있고, 그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이곳이 절터로 적합하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이곳에 현오국사의 탑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부도 등도 있었을 텐데, 부도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봄이 오는 길목에 찾아간 현오국사 탑비. 발굴조사가 다 끝나면 또 다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발굴지 지도를 보니 2차 조사 지역만 해도 1,780㎡라고 한다. 첩첩이 쌓인 축대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으로 보나 이 일대가 모두 서봉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서봉사지를 왜 진즉에 찾아오지 못했을까? 문화재 하나를 만나는 길이 꽤나 길었다는 생각을 한다.

사봉사지, 보물, 현오국사 탑비, 광교산, 신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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