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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
‘행궁동’과 ‘인계동’ 거리만큼 멀게 느껴져
2015-02-09 15:59:48최종 업데이트 : 2015-02-09 15:59:48 작성자 : 시민기자   이대규

수원에 이사와 살게 된지도 십년이 훌쩍 넘었다. 서울로 출퇴근하며 바쁘게 살아야 했던 시절에는 몰랐지만 제2의 고향이 되어 시내 어디를 둘러보아도 새롭게만 느껴진다. 
수원은 서울과 수도권을 오가는데 있어 교통문제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문화, 역사의 도시라는데 마음 편히 안착할 수 있었다. 도시 한 복판에 사대문과 동장대, 서장대, 화홍문, 방화수류정 등 십리 화성을 볼 수 있고,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밖에 몰랐는데 '정조대왕'도 있다는 것을 수원에 와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뿐이랴. 역사의 뒤안길을 되돌아보며 팔달산 아래 행궁을 지나 선경도서관을 가다보면 행궁동주민센터가 있고, 바로 그 옆 공터에는 소공원이 있다.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_1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_1

이곳에서는 해마다 '나혜석 생가 터 문화예술제'가 행궁동 주민들이 주관하여 수원시와 수원문화재단이 후원한 가운데 열린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나혜석이 '화령전' 앞으로 걸어서 다녔던 길에는 작약 꽃이 붉게 피어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월 나혜석은 일본에 유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 시와 소설을 발표하였고, 문인으로서도 활동하며 독자적인 여성의식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3.1독립운동 때에는 여학생 참가 계획을 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중국에 들어가 외교관의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독립 운동가들의 편의를 돌봐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그는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여겨지던 때에 봉건적인 사회관습에 도전한 여성운동가이자, 시대적 선각자일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시대에 비쳐보아도 오십 년은 더 앞서갔던 재능 있는 예술가라는 평도 있다. 

그는 당시,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는가 하면,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며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등을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강변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냉대로 소외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불륜을 저지른 이혼녀라는 신여성으로만 더 잘 알려진 나혜석의 진정한 모습을 이제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알 것 같았다. 

언젠가 보았던 문헌이 떠올랐다. 생활비를 벌기위해 나혜석은 그림 전시회를 열었지만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뒤 수덕사와 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행적이 묘연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는 정신장애와 함께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고, 그렇게 고생하다가 해방 후 서울의 자혜병원에서 행려자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_2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_2
 
이곳 행궁동 골목을 따라서 들어가면 나혜석 생가 터의 표석과 함께 담장에는 옛 모습을 상기하듯 벽화가 그려져 있다. 수원 출생이라는 것과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옛말처럼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장안문과 남쪽으로는 화령전 앞길에 이르게 되어 '나혜석옛길'이라고 이름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계동에 또한 '나혜석거리'가 있다.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이 헷갈리는 것은 나 뿐 만이었을까. 필시 무슨 관련이 있을까 궁금하여 수소문한 이야기는 그러했다. 
지난 2000년 국가가 지정하는 문화인물로 정월 나혜석을 선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혜석거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_3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_3
 
그동안 어렴풋이 귀동냥만 해오던 나혜석거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곳에 있었고, 그래서 더 헤매야만 했다. 쉽게 말해 나혜석거리는 인계동의 갤러리아백화점과 뉴코아백화점의 중간쯤에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보면 자칫 놓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고, 찾는 이들에게 나혜석거리임을 상기시켜주려는 많은 노력들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인위적인 것만 같아 보이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한마디로 주변 양쪽 모두가 '먹자골목'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아 보였다. 마치, 하얀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갓을 쓰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형상이 자꾸만 그려져 왔다.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_4
'나혜석거리'와 '나혜석옛길' 알 것 같아요_4
 
그러나 나의 안목 없는 탓만 같았고, 사유를 거듭하며 무지를 깨운 것은 '어울리지 않음의 어울림'이었다. 그것이 나혜석거리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정답인지도 몰랐다. 
유교적 봉건사상에 잠들어 있던 그 시절,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로 일백년을 앞서간다는 그의 앞에 어울림은 애초부터 부재였지 않았을까. 귀향의 꿈을 꾸고 있는 듯, 그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행궁동의 작약 꽃 붉게 피는 옛길이 자꾸만 서성거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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