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정조는 정약용에게 거중기를 만들게 했다
[연재소설 226회] 1800년, 華城 /월~금 연재
2010-08-12 10:43:23최종 업데이트 : 2010-08-12 10:43:23 작성자 :   e수원뉴스
정조는 정약용에게 거중기를 만들게 했다_1
그림/김호영


장용외영의 5초는 전초는 진위, 좌초는 양성, 중초는 용인, 우초와 후초는 광주였다. 모두 융능이 있는 화성을 호위하는 형국이었다.

  실제로 정조는 장용영과 외영을 만든 뒤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까지 장용영의 비용으로 돌려주었다. 

  또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옷 투구 같은 무기와 곡식과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들까지 바로잡아 장용영에서 유용하도록 조치했다. 

  정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었다.

  장용외영에 대한 정조의 관심은 더욱 각별했다. 임금은 조선 개국 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는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각기 한 사람에게 주어 마상무예를 연마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정조는 장용영 군사들의 선발을 통해 소외세력의 사회적 진출을 추진했다. 특히 서북지역 백성에 대한 배려와 서얼들에 대한 인재 발굴에 힘써 서북지방의 무사를 특별히 선발하도록 지시까지 내렸다. 

  그렇게 장용영은 최고의 무기와 최고의 군사들이 모인 조선 최고 최대의 군영이 되어갔다. 

  심환지는 정조 임금의 군대, 장용영의 탄생에 묘적사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주슬해를 통해 확인해 나갔다. 주슬해는 성실하게 묘적사에서 듣고 본 일들을 밀지를 통해 전해왔다. 

  그럼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묘적사를 없앤다고 해서 이미 자리를 잡아버린 장용영을 무력화시킬 수 없었기에 묘적사에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임금은 화성의 건립을 위한 수순을 하나씩 밟아나가고 있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궁증 비서인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 주며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거중기를 만들어내게 했다. 

 <도서집성>은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든 백과사전이었고, <기기도설>은 스위스인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요한 테렌츠가 지은 물리학의 기초에 관한 책으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기계장치가 그림과 함게 실려 있는 책이었다. 궁중 비장 도서였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어내고, 화성 규약이 완성되자 화성 축성에 대한 계획은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글/이기담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