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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궐리사 석전대제, 수원의 역사문화 콘텐츠로 인식해야
문묘제례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돼
2023-03-14 16:19:50최종 업데이트 : 2023-03-14 16:19:47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오산시에 있는 화성궐리사, 성묘 앞에서 춘기 석전대제

 화성궐리사, 성묘 앞에서 춘기 석전대제


'수원'이란 이름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었다.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모수국, 벌물, 매홀, 물고을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수성군, 수주를 거쳐 '수원'이 되었다. 1789년 수원부 읍치가 있던 안녕리에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이 이장되면서 수원부의 읍치를 현재 화성행궁으로 옮겼고 수원부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1793년 '화성유수부'가 될 때까지 천 년 이상 수원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지만, 당대 사람들은 입에 친숙한 '수원유수부', '수원유수' 등으로 인식하고 불렀다. 조선왕조실록, 화성성역의궤 등 당대의 기록을 보면 '화성유수부'와 '수원유수부'를 혼용해서 기록했다. 수원 지명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은 워낙 뿌리가 깊어 어느 날 갑자기 이름을 바꾼다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다.

오산시에 있는 화성궐리사 입구의 홍살문과 하마비, 외삼문인 솟을삼문

화성궐리사 입구의 홍살문과 하마비, 외삼문인 솟을삼문


1899년 편찬한 수원군읍지 기록에 의하면 "수원군의 둘레는 580리이다. 동서로는 120리, 남북으로는 125리이다. 동쪽으로 용인까지의 경계가 20리, 서쪽으로 남양까지의 경계가 40리, 남쪽으로 진위까지의 경계가 40리, 북쪽으로 광주까지의 경계가 15리가 된다" 오늘날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1895년 다시 수원군이 되면서 수원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1949년 수원군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화성군과 분리되었다. 이어서 1989년 화성군에 속해 있던 오산읍이 오산시로 승격해 분리됐고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었다. 수원이 인위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역사 문화적 정체성이 배제되면서 3곳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오산시에 있는 화성궐리사 은행나무

화성궐리사 은행나무


천 년 이상 수원이었던 지역이 현대에 와서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로 쪼개지면서 문화유산도 세 도시로 흩어졌다. 수원에는 수원화성, 화성행궁, 향교 등이 남아있고 화성시에는 융건릉이 있고, 오산시에는 화성궐리사, 독산성 등이 남아있다. 이들 문화유산은 하나의 '정조 문화권'으로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세 도시에 흩어져있는 문화유산이 다른 도시에 있다고 배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이 '수원'이란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수원화성문화제의 꽃인 '정조대왕능행차'는 서울에 있는 창덕궁에서 출발해 수원을 거쳐 화성시의 현륭원(현 융릉)에 도착해야 완성이 되는 것이다.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가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한 뿌리에서 나온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오산시에 있는 화성궐리사, 공자 영정을 모신 사당인 성묘

 화성궐리사, 공자 영정을 모신 사당인 성묘


오산시에는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가 있다. 궐리사 입구인 외삼문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아주 잘생긴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1483-1541) 선생이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서당을 세우면서 심은 나무라고 한다. 공서린 선생은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 자리에 서당을 열고 은행나무를 심은 후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오산시에 있는 화성궐리사, 공자상

화성궐리사, 공자상


'궐리지'에는 공서린이 은행나무에 북을 매달아서 학업을 권고하는 신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공서린이 죽자 이 은행나무도 말라 죽었다고 한다. 약 200여 년이 지난 뒤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1792년(정조 16년)에 공서린 선생의 이야기를 들은 정조가 이 장소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궐리사로 부르게 해 이 은행나무가 궐리사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오산시에 있는 화성궐리사, 내삼문

화성궐리사, 내삼문


정조대왕은 궐리사에 '성묘(聖廟)'라는 친필 현판을 내렸고 이문원에 보관되어 있던 공자 영정을 궐리사에 옮겨 봉안하게 했고 봄, 가을에 향과 축을 내려 지방 수령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조선으로 이주한 공자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이곳에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둥성 곡부현의 실제 지명인 궐리를 붙여 동네 이름도 궐리라 했다.

화성궐리사는 공자가 돌아가신 날인 음력 2월 18일 춘기 석전대제를 지내고, 공자가 탄생한 날인 음력 8월 27일에는 추기 석전대제를 지낸다. 정조대왕은 "지방관인 수원 판관에게 초헌관을 맡게 하고 공씨에게 아헌관과 종헌관을 맡게 하라. 이것을 정식으로 삼으라"라고 지침을 내렸다.

오산시에 있는 화성궐리사, 행단 앞에서 춘기 석전대제 식전행사

화성궐리사, 행단 앞에서 춘기 석전대제 식전행사


지난 9일 화성궐리사에서 '공부자 탄강 2574년 춘기 석전대제'를 지냈다. 코로나로 인하여 몇 년째 자체 행사로 진행하다가 외부인사를 초청하고 관람객에게 개방해 행사를 진행했다. 석전대제는 신위 앞에 향을 피우고 폐비를 올리는 전폐례, 초헌관이 신위 앞에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례, 아헌관이 신위 앞에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 종헌관이 신위 앞에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례, 음복을 행하는 음복례, 축문과 폐비를 태우는 망료례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오산시에 있는 화성궐리사, 성묘 앞에서 춘기 석전대제

화성궐리사, 성묘 앞에서 춘기 석전대제


제향을 올리는 중간중간에는 문묘제례악이 울려 퍼져 분위기가 더욱 엄숙하면서도 절도 있게 진행되었다. 많은 관람객도 문묘제례악이 밋밋하고 지루하게 진행되는 제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반응이었다. 수원시에서 왔다는 관람객은 "음악이 있으니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행사에 집중할 수 있었고 한문으로 된 홀기를 우리말로 풀이해 읽어줘서 행사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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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궐리사, 공부자 탄강 2574년, 춘기 석전대제,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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