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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에서 만난 정조대왕 글씨 '정조보묵'
사도세자를 추억하는 마음 애틋한 내용
2023-03-07 13:40:08최종 업데이트 : 2023-03-07 13:40:06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경기도박물관 정조어필

경기도박물관 정조어필

 
경기도박물관 관람 중 뜻하지 않게 정조대왕 글씨를 보게 되어 반가웠다.
정조대왕이 8일간 수원행차를 다녀온 후인 1795년 3월 7일 세심대에서 쓴 것이다. 이날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사당인 육상궁,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 사당인 선희궁,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 사당인 연호궁을 참배하고 사도세자의 옛 사당 터 근처에 있던 세심대에 올라 감회를 쓴 것이다.

이는 '정조보묵'이란 제목의 두루마리 형태이다. 정조대왕 특유의 글씨가 적힌 안진경체 행서는 힘차면서 운필이 빠르고 짜임이 중심으로 모이는 점과 질박한 특징을 갖고 있다. 정조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확실한 서법 이론을 지닌 글씨를 대단히 잘 쓴 왕이다. 

일성록과 홍재전서에 나오는 글에 따르면 정조대왕이 매년 이때마다 신하들과 함께 꼭 세심대에 오른다.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꽃을 감상하며 한가하게 즐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처음 세울 때 터를 잡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추억하기 위해 세심대에 오르는 것이었다.

1735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태어나 나라에 경사가 있었을 때 영성군 박문수(1691-1756)가 여러 사람과 세심대에 모여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으로 사도세자 탄생을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정조대왕은 신하들과 세심대에 올라 박문수의 시를 읊으면서 당시의 일을 회고하려고 한 것이다. 

경기도박물관 정조어필, 박문수 시가 있는 부분

경기도박물관 정조어필, 박문수 시가 있는 부분


君歌我嘯上雲臺(군가아소상운대)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휘파람 불며 필운대에 오르니 李白桃紅萬樹開(이백도홍만수개) 오얏꽃은 하얗고 복사꽃은 붉게 수많은 나무에 피었네. 如此風光如此樂(여차풍광여차락) 이런 풍광을 이렇게 즐기면서 每年長醉太平杯(매년장취태평배) 해마다 태평 술잔에 길이 취하리라.

정조대왕도 박문수 시에 운을 따라 시를 지었다. 春日遲遲上北臺(춘일지지상북대) 봄날 해가 느릿느릿한 때에 북쪽 대에 오르니 此行非是趁花開(차행비시진화개) 이번 행차는 꽃이 핀 것을 구경하러 온 게 아니네. 新詩更續觀華曲(신시갱속관화곡) 새로 지은 시가 다시 관화곡을 이었으니 萬歲長斟萬壽杯(만세장짐만수배) 만세토록 만수 술잔을 길이 따르리라.

운을 따라 시를 짓는다는 것은 첫 번째 연의 마지막 글자인 대(臺), 둘째 연의 마지막 글자인 개(開), 넷째 연의 마지막 글자인 배(杯)를 똑같은 글자로 맞춘다는 것이다. 신하들에게도 시에 운을 따라 지으라고 명했다. 초계문신 홍인호, 정약용, 조석중, 황기천에게 각각 1본씩 베껴 여러 대신에게 전하게 하여 갱운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경기도박물관 정조어필, 정조대왕 시가 있는 부분

경기도박물관 정조어필, 정조대왕 시가 있는 부분


이 당시 세심대에 있던 영의정 홍낙성, 좌의정 유언호, 우의정 채제공, 영돈녕부사 김이소, 판중추부사 김희, 이병모, 의궤청 당상인 수어사 심이지, 경기 감사 서유방, 예조 판서 민종현, 호조 판서 이시수, 공조 판사 이가환, 정약용, 유득공, 박제가 등 55명의 신하와 유생들이 시를 지어 올렸다. 이때 지은 시를 모은 것이 '세심대갱재축'이다. 갱재란 왕이 지은 시에 운을 맞춰 화답하는 시를 지은 것이다.

정조대왕의 시에는 '지지대'라는 이름의 연원이 나와 있는데 신하들에게 시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미륵현은 화성의 초계인데 해마다 원소를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미륵현에 이르러 한참 동안 바라보곤 하였으며 돌아가자고 말하기가 편하지 않았다. 그 부에 사는 사람들이 돌을 빙 둘러 쌓고 그 땅에 대를 만들었는데 금번 행차 때에 그 대를 지지대라고 이름 지었으므로 시의 첫째 구에 언급한 것이다. 또 어머니께서 화성에 행차하시어 진찬하던 날의 악장에 관화곡이 있었으므로 세 번째 구에 언급한 것이다"

정조대왕은 어디를 가나 시를 지으면 신하들에게 화운해 짓도록 했다. 어떤 때는 채점을 해 순위를 매기고 시상을 하고 책으로 만들었다. 정조대왕 시대에 '갱재축'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이다. 당대의 선비들은 시와 문장이 필수였겠지만 연회를 할 때마다 시를 지어야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를 제대로 지을 수 없으면 벼슬을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경기도박물관에 방문하면 2층 조선실에 있는 정조대왕 친필을 꼭 보기를 권한다. 어필을 보면서 1795년에 있었던 많은 스토리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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