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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가 만든 최고의 걸작품, 수원화성
축성 공사 중단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2023-03-03 13:43:39최종 업데이트 : 2023-03-03 13:43:36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수원화성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은 화성 축성 과정과 신도시 수원 건설 과정을 전반적으로 볼 수 있다.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와 친위부대 장용영에 관한 내용도 수원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원화성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은 화성 축성 과정과 신도시 수원 건설 과정을 전반적으로 볼 수 있다.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와 친위부대 장용영에 관한 내용도 수원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자주 간다. 얼마 전에 끝난 '독서 대왕 정조의 글과 글씨' 전시도 맨 처음 찾고 끝 무렵에 또 갔다. 그곳에 가면 2층 상설전시실도 꼭 들른다. 화성 축성 과정과 신도시 수원 건설 과정을 전반적으로 볼 수 있다.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와 친위부대 장용영에 관한 내용도 관심 있게 본다. 도록과 영상 자료 등이 수원화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중에 화성 축성 일정표가 있다. 1794년 1월 숙지산에서 석재를 뜨기 시작해서 1796년 10월 16일 낙성연을 열 때까지를 잘 정리해 놓았다.화홍문의 주춧돌을 놓은 시기와 팔달문 등의 중요 시설 상량 날짜까지 볼 수 있다. 축성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그려 놓아 당시 작업 과정이 머릿속에 연상된다. 

  그런데 일정 중에 성곽 구조물과 관계없는 내용이 있다.
'1794년 4월 28일 제중단을 나누어주다, 6월 25일 척서단을 나누어주다. 7월 12일 폭염으로 성 쌓는 일을 잠시 멈추다. 11월 1일 빈민 구제를 위해 잠시 공사를 중지하다.'라는 내용이다. 

화성 축성 일정표. 제중단과 척서단을 나눠주었는 기록이 있다. 폭염에는 쉬고,  빈민 구제를 위해 공사를 중지했는 기록도 보인다.

화성 축성 일정표. 제중단과 척서단을 나눠주었는 기록이 있다. 폭염에는 쉬고, 빈민 구제를 위해 공사를 중지했는 기록도 보인다.


  제중단은 비상 구급약의 일종이다. 급체나 설사 등을 치료하는 데 사용했는데, 약효가 뛰어나다고 한다. 화성 공사 때에 처음으로 만들어 인부들에게 지급했다. 6월에 나눠준 척서단도 마찬가지다. 척서단은 더워 먹은 사람이나 더위에 몸이 쇠약해진 사람에게 주는 약이다. 

  당시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은 조선 전 지역에서 왔다. 거주지와 먹는 것이 바뀌면 병이 난다. 인부들이 병이 나면, 공사의 효율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더위에도 공사를 강행해 봤자 효율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사고 위험 등에 노출돼 공사가 더 늦어질 가능성이 크다.

  수원 화성 건설은 정조 개혁 정치의 상징이었다. 붕당 정치를 근절하고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한 대업이었다. 조정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노론 세력을 잠재우기 위한 도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12일 폭염으로 성 쌓는 일을 잠시 멈추었다.'라는 기록은 모순처럼 느껴진다. 공사 중단은 축성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지닌 세력에게 명분을 줄 수 있다. 이때는 보통 축성 중단보다는 계속해서 건설하는 방안을 찾는다.

 하지만 정조는 백성을 생각했다. 실록에도 '한 가지라도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설사 공사가 며칠 안에 이루어지는 효과가 있더라도 나의 본뜻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택보다는 백성을 생각하는 정의로운 길을 갔다. 이런 통치력은 오히려 반대 세력도 침묵하게 만든다. 

  정조 임금이 더위에 화성을 쌓는 공사장의 일꾼들을 안타깝게 여겨 약을 내렸다는 기록은 실록에도 있다. 정조실록(정조 18년 6월 28일, 1794년)에 약 '척서단' 4천 정을 지어 내려보냈다고 나온다. 같은 해 7월 6일에는 '화성 공사 중 돌을 뜨고 기와를 굽는 곳의 작업은 서늘한 기운이 생길 때까지 정지'하라고 전교를 내렸다. 빈민 구제를 위해 공사를 중단한 시기도 있다. 12월 공사 후 1976년 4월 16일 화양루 지을 터를 닦았으니, 그 사이 겨울에는 공사를 중단했다. 
 
정조는 더위에는 공사를 쉬자고 한다. 백성을 생각하는 임금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정조는 더위에는 공사를 쉬자고 한다. 백성을 생각하는 임금의 마음이 담겨 있다.


  화성 공사를 중지하는 일에 관해 윤음(정조실록, 정조 18년 11월 1일, 1794년)을 내리면서 '이 공사를 어찌 급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마는 당초 이미 10년을 기한으로 잡았으니 반드시 시일이 급하다고 할 수는 없다.'라는 말을 한다. 화성기적비에 '공사 기간은 34개월이었지만, 중간에 6개월을 쉬었다.'라고 밝히고 있듯, 쉬는 것도 공사의 연장으로 생각한 것이다. 

  전 근대 사회에서 기술자나 인부 등은 봉건적 신분 제도에 얽매여 있었다. 당연히 국가적 사업을 할 때도 그들의 역량이나 처우는 고려되지 않는다. 정조는 달랐다. 기술자와 인부 등 노동자의 배려에 주목한다. 겨울에는 솜옷과 모자를 나눠주고, 여름에는 부채를 나눠줬다. 수시로 웅어, 준치, 쌀 등 먹을거리를 준다. 요즘 말로 노동자의 근로 조건에 힘썼다. 건강권을 보장해 주고 복지 혜택을 늘렸으니, 오히려 노사 갈등 없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수원화성은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만든 걸작품이다. 당시에는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 높은 인권 의식이었다.

수원화성은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만든 걸작품이다. 당시에는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 높은 인권 의식이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다수 고용하는 사회 변화가 왔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도 정조 때에 자본주의와 임금노동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장인들이 품삯을 받고 일을 하고, 사회적 존중을 받는 분위기는 봉건적 신분제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조의 애민 정신을 유교주의 국가에서 왕의 당연한 정치적 덕목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후 백성을 돌보는 정치는 실종됐다. 백성은 힘들어졌고, 급기야 전국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수원화성은 조선 최고 수준의 과학이 남긴 문화유산이다. 세계도 인정한 문화유산이다. 여기에 더 추가할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 수원화성은 백성을 생각하는 임금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인부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만든 걸작품이다. 당시에는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 높은 인권 의식이었다. 선조가 만든 위대한 문화 의식에 자부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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