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수원역에서 전철을 탄다.
시간에 상관없이 대체로 전철 안은 많은 승객들로 붐비고 있어서, 자리에 앉는 것은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타는 편인데, 다행히 병점에서 출발하는 차량인지 빈자리가 꽤 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간 책을 꺼내 읽는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남은 분량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열심히 읽는데, 얼마쯤 가니 나른하면서 졸려오기 시작한다. 전철안의 따뜻한 난방이 책을 읽는 것보다는, 달콤한 잠의 세계로 나를 자꾸만 이끌어 간다. 보던 책을 덮고 달콤한 잠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참을 달게 자고 있는데, 무릎위에 무엇인가 놓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일어날 때도 된 것 같아 눈을 떠보니, 도와달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코팅한 종이다. 전철을 탈 때면, 가끔 겪는 일이라, 문구 내용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아직 잠에 취해있는 나를 수습한다.
보던 책을 다시 보기 위해 펼쳐들고 읽으려는데, 그 종이의 주인이 다시금 승객들을 돌면서 코팅된 종이를 회수하는 중이다. 옆자리 승객의 것을 가져가고 다음은 내 것을 가져갈 차례이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내 앞에 서있던 다른 승객의 뒤로 손만 내뻗는다. 앞에 서 있던 승객을 밀치고 올수가 없었던 것 같다.
계속 손짓만 하고 있어 내가 종이를 집어서 그 사람의 손에 들려주려던 순간, 갑자기 나무토막이 쓰러지듯 코팅지의 주인이 전철 바닥으로 쓰러져 버린다. 아마 발이 꼬인 듯싶다. 그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전철안의 모든 승객들이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 나도 그저 놀라, 입만 벌리고 그대로 있을 뿐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승객 몇 사람이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일어나지를 못한다. 넘어진 사람은 3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다. 그런데, 다리가 정상적으로 굽었다 폈다가 안 되는 것 같다. 보통의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자세가 안 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남자 승객들이 겨우 일으켜 세운다.
의자에 앉아 있던 몇 사람이 일어나며, 그 자리에 앉아서 잠시 쉴 것을 권유했으나 기대 있는 게 더 편한지 전철 문으로 가서 기대고 선다. 넘어진 남자를 일으켜 세운 몇 분의 승객 중 한분이 코팅지의 주인을 야단친다. 전철 문이 열리면 위험하니 차라리 기둥에 기대 있으라며 부축한다.
그런데 전철 문에 잠시 기대고 있던 남자는, 아직 채 회수하지 못한 자신의 물건들을 회수하러 몸을 움직인다. 조금 전 남자를 야단치던 아저씨는 계속해서 남자에게 야단을 친다. "그 몸을 해 가지고 왜 돌아다니느냐, 뇌진탕으로 죽을 뻔 했는데 집에 가만히 있지 왜 나왔느냐, 그저 주는 밥이나 먹고 있지 그까짓 돈은 벌어서 뭐한다고 추운 날 돌아다니느냐"며 계속 소리친다.
내가 그 남자를 밀친 것도 아니고, 그저 내민 손에 쥐어주려고 종이만 내밀었을 뿐인데 내 앞에서 넘어진 남자로 인해 죄인 인 듯한 나의 귀에, 계속 야단치는 승객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그 승객의 말투와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두터운 겨울옷과 모자로 인해 나이를 가늠 할 수 없는 승객은, 자신이 일흔다섯의 노인이라며, 나이 먹은 노인 아니면 누가 그런 말을 해주겠느냐고 안타까워하신다. 눈물이 날 것 같은걸 꾹 참는다.
추운 날, 정말 큰일을 당할 수도 있는 불편한 몸으로 구걸을 나서야만 했을 남자의 알 수 없는 사정도 아프게 가슴을 찌르고,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주는 밥이나 먹고 있지 왜 나섰느냐며 끝없이 야단치시는 할아버지의, 말씀과는 다른 속 깊은 따스함이 또 아프게 나를 헤집는다.
주는 밥만 먹고 있을 상황이 아니거나, 주는 밥도 없는 상황일수도 있는 남자. 이런저런 불신의 시대를 살다보니, 불편한 몸으로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눈에 비치는 저 모습이 사실일까 싶어서 아예 무관심으로 지나친다.
불우한 이웃을 돕자는 거리의 모금함, 몸이 아픈 누군가를 돕자는 아름다운 거리의 노래 소리도 불신으로 가득 찬 나의 마음을 열지는 못한다. 그동안의 나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내 속에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몇 년째, 몇 군데 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기도 하고, 가끔은 진실인 것 같은 모습의 사람들에게는 작은 정성을 주기도 한다.
전철안의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된 듯하여 다시 책을 펼쳐 들었는데,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두드리는 손길이 있어 바라보니 조금 전 넘어졌던 남자다. 코팅지를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제대로 소리가 돼서 나오질 않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계속 종이를 가리키며 뭐라고 하는데 그곳에 씌여진 걸 보라는 것 같다.
몇 개의 계좌번호가 적혀있다.
순간 계좌번호를 적을 수는 없고 카메라로 찍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 두 분이 코팅된 종이 위에 1천원씩을 올려 주신다. 그제야 나도 지갑을 꺼낸다. 그런데 옆자리 승객처럼 1천원짜리 한 장으로는 안 될 것 같아 1만원짜리를 꺼내 올려놓는다.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펑펑 쏟아내고 싶은걸 꾹 참는다.
내가 내미는 1만원 한 장이 그에게 과연 얼마만한 도움이 될까. 불편한 몸으로 어렵게 받은 돈이 과연 그 남자의 것일까, 역시나 불신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나의 아픔은 계속 나의 깊은 곳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