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년 된 사랑나무가 성흥산성 정상에
2013-08-03 22:04:48최종 업데이트 : 2013-08-03 22:04:48 작성자 : 시민기자 심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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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때 삼천궁녀가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성흥산성 등 백제의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답사를 떠났다. 4백년 된 사랑나무가 성흥산성 정상에 _4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수도 상징적일 뿐이지 정말 삼천명인지는 알 수없는 일이다. 바위의 높이도 실제 50여 미터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여튼 그 곳에서 떨어졌다면 물에 빠져 죽었던지 바위에 부딪쳐 죽었든지 죽음은 면치 못했음은 분명한 것으로 보였다.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 낙화암 맨 꼭대기의 정자 백화정은 1929년에 일본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백제의 멸망이나 낙화암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한다. 궁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바르지 않는 것은 3.1운동 후 1930년대는 일본이 우리민족의 문화 말살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이므로 어불성설이다. 고란사를 중심으로 선착장 왼쪽에 작은 바위가 보인다.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의 혼백을 낚아 올렸다는 조룡대이다. 소정방이 낚싯대로 끌어올린 용의 혼백을 던진 곳이 용전리인데 이곳 또한 요즘 들어와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서인지 용정리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하니 역사의식 부재에 따른 슬픈 현실이다. 길을 거슬러 성흥산성으로 올라간다. 덥고 지친다. 찌는 듯한 더위에 연신 부채질을 하지만 찜통 같은 열기를 어찌 할 수 없다. 고고한 외양과 달리 온통 지독한 냄새를 발산하는 사슴우리를 지나 점심 도시락을 지급 받았다. 답사 내내 동행했던 지인과 함께 그늘도 없는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허기진 배를 채웠다. 벌써 내려오는 선두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마지막 코스를 단념할 수는 없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올라가니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전설이 내려오는 사랑나무라고도 불리는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으로 오르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4백년 된 사랑나무가 성흥산성 정상에 _2 4백년 된 사랑나무가 성흥산성 정상에 _1 산 아래 펼쳐지는 마을이 장난감을 놓아 둔 것처럼 한 눈에 들어온다. 솔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소나무 향기를 타고 넘실거린다. 이 성흥산성은 사비천도 이전인 서기501년에 쌓은 백제 때 성곽으로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다. 또한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불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에는 백제부흥의 거점이 되었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므로 18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4백년 된 사랑나무가 성흥산성 정상에 _3 느티나무에서 평지 안쪽으로 들어가니 우물이 있었다. 관리 미흡으로 물위에 검불이나 깨진 바가지로 물을 마실 수는 없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우물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고려의 개국 공신인 유금필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은 고려 초기에 장군 유금필이 견훤과 대적하다가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라고 한다. 잊고 있었던 산성 아래 세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타고 요란한 부름이 울려 퍼졌다. 늦게 올라온 만큼 빨리 서둘러야 했었는데 풍광에 도취되어 그 많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뒤떨어진 일행들 중에 아는 얼굴들이 있다. 내려오는 중에 또 다른 일행들과 합류한다. 조바심치면서 내려오던 발걸음이 잠시 안도의 숨을 쉰다. 제한 된 시간동안 많은 것을 보기 위하여 동분서주했던 하루는 1천500년의 역사를 온전히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 지정에 관하여 논란이 한창인 요즘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한국사 바로 알기가 비단 학생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현장에서 알 수 있었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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