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비 이방자여사의 생전 모습 지난 2월 18일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유물을 언론에 공개했다. 전시가 아닌 공개여서 언론에만 잠깐 노출이 된 셈이다. 이날 공개된 유물은 영친왕비의 일기, 편지, 글 등이다. 그렇다면 영친왕비가 과연 누구인지 재조명해 볼 필요성이 있다. 구한말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아간 뒤 일제는 조선왕가의 재건을 막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다가 그 중의 하나로 조선의 왕족과 일본의 왕족을 결혼시키는 전략을 편다. 이 전략의 희생양이 된 사람이 조선의 영친왕과 일본의 나시모토 마사꼬(이방자)다. 마사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일본측 의사들의 진단에 따라 일본은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 위해 강제적인 결혼식을 치른다. 조선에서 큰 반대를 했지만 권력은 이미 일본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반대를 해도 그 힘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1919년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일본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자녀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을 받았던 이방자여사는 놀랍게도 이진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사실은 일본에도, 조선에도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진은 태어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죽게 되는데 이진이 죽은 원인에 대한 여러 설들이 난무한다. 일본측의 독살설, 조선측의 독살설, 건강이상설 등 다양한 설들이 있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자식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한 이방자여사는 큰 슬픔에 잠기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큰 기쁨에 쌓이게 되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 기거하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왕족이라는 신분을 잃어버리는 아픔에 처한다. 한국으로 환국하려고 해도 왕족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염려로 귀국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한국으로 귀국을 하고 국적을 회복한다. 그 후 1970년이 되어 영친왕은 지병으로 숨지게 되고 홀로 남은 이방자 여사는 장애인복지에 큰 공헌을 하다가 1989년 낙선재에서 숨지게 된다. 항간에 이방자여사의 국적에 대한 비난의 글이 많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역사속의 슬픈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강제적인 힘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인물들이다. 왕족이라는 신분이 항상 행복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본다. 그리고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국적이 불분명한,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도 한국인임을 고집하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을 위해 수없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했음은 분명하다. 슬픔과 고통의 나날을 꿋꿋하게 버텨내고 사회복지의 큰 획을 그은 두 분에게 감히 경의를 표한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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