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현판이 바닥에 있는 이유?
봉수당 현판자리가 원래 자리다
2015-07-23 15:53:33최종 업데이트 : 2015-07-23 15:53:33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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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관광활성화를 위해 화성행궁, 수원화성, 수원박물관, 화성박물관, 광교박물관을 7월부터 9월까지 무료로 개방하고 있고, 화성행궁은 야간에도 개방 한다. 특히 화성행궁 안에서는 수요일 밤에 야한(夜寒)음악회, 금요일 밤에 인문학콘서트가 열려 해가 넘어갈 무렵부터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다. 정조대왕이 쓴 화성행궁 현판 신풍루(新豊樓)로 들어가면 정면에 좌익문(左翊門)이 보인다. 좌익문을 지나 좌측 협문으로 들어가면 유여택(維與宅)이 있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왼쪽에 공신루(供宸樓)란 휴식 공간 1칸이 붙어있고,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 있어 건물이 아주 품격 있어 보인다. 유심히 살펴보니 유여택 건물에 3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유여택(維與宅)'이란 현판과 그 옆에 '공신루(供宸樓)'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유여택 건물 내 마루 위에 '장남헌(壯南軒)'이란 현판이 하나 더 있다. 유여택 마루에 있는 장남헌 현판 '기유년(1789, 정조 13) 가을에 수원부가 다스리는 곳을 팔달산 아래로 옮겨 짓고 그 건물을 그대로 행궁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당(正堂)은 임금이 편액을 써서 장남헌(壯南軒) 또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 하고, 평상시에는 부사가 집무를 하게 하였다. 을묘년(1795)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 음식을 올릴 때에 또 편액을 내려 봉수당(奉壽堂)이라고 하도록 하였다.' 봉수당 내력에 대한 '화성성역의궤'의 내용이다. 봉수당이 원래는 장남헌이나 화성행궁이란 현판을 걸고 있다가 봉수당 현판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설자리를 잃은 장남헌 현판은 유여택 마루위로 갔고, 화성행궁 현판은 화성행궁 앞에서 이곳이 화성행궁이란 간판 역할을 하고 있다. 화성행궁 현판이 왜 걸려있지 않은 것인지 이해가 갈 것 같다. 장남헌, 화성행궁 현판글씨는 정조대왕의 친필이며 실물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있고, 화성행궁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화성행궁 정전 건물인 봉수당 현판 봉수당을 바라보고 있으면 뭔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한참을 뜯어보고 생각해보니 두 가지가 보인다. 하나는 봉수당 현판이다. 얼핏 보기에도 현판이 너무 커서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현판이 이렇게 달려있었을 리는 없다. 봉수당 처마 밑에 달려있긴 한데 출입구 위쪽을 가리고 있어 왕이 들어갈 때 허리를 많이 숙여야 했을 것 같다. 봉수당을 오르내리며 머리로 받는 일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또 하나는 봉수당으로 들어가면 왕이 앉는 자리가 있는데, 왕이 앉아서 밖을 보면 기둥이 시선을 가리고 있다. 원래 이렇게 배치를 한 것인지 궁금하다. 신풍루에서 좌익문 중양문 봉수당까지 일직선 위에 있으면 시야가 탁트여 전망은 좋을텐데.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현판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로 들어가면 화성을 지키던 군사인 장용외영 5위의 깃발이 좌우에서 펄럭이며 관람객을 맞이한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그리고 중앙의 황룡 깃발이 반기고 있다. 행궁 건물의 특징을 한옥이란 측면의 멋스러움과 공간배치를 눈여겨보면 또 다른 볼거리가 생긴다.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팔달산 중턱에 있는 미로한정에 앉아 화성행궁을 내려다보는 풍광도 좋다. 자주 방문하다보면 안보이던 화성행궁만의 매력이 눈에 들어온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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