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유묵전시회에 다녀오다
"나의 의거는 오로지 동양평화를 도모하려는 것!" 감동
2010-01-12 09:08:44최종 업데이트 : 2010-01-12 09:08:44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
연초(年初) 폭설의 잔영이 산천에 그득하던 지난 토요일(9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다녀왔다. 안중근 의사 유묵전시회에 다녀오다 _3 안중근 의사 유묵전시회에 다녀오다 _2 금요일 밤 '안중근의사 유묵전시회'에 가기로 마음먹은 후, 인터넷 상에 떠있는 몇몇 작품들을 먼저 만나보았다. 한 작품 한 작품 뜻을 살펴보며 나의 국가관도 생각해 보기도 하고, 당시 안중근의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헤아려보며 1910년대를 그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다녀온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연추마을-단지 동맹비가 있는 마을)을 떠올리며 하얼빈 거사 전에 12명의 의병동지들과 '대한독립'을 맹세했던 안의사의 의지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커다란 느낌이 없었는데 이번 전시를 보고 나의 국가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예술의 전당에 도착하여 내리기전까지 우리 역사에 큰 획을 남긴 독립투사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리랑의 '김산', '백범 김구', 상해 홍구공원에 세워져있는 '윤봉길의사', '이봉창의사'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선생님 등 수없이 많다. 복잡한 마음을 다지며 서예박물관 전시실에 발을 들이는 순간, 무엇인가가 나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필묵(筆墨)에서 전해지는 비장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슬픔은 이내 숙연함으로 바뀌었지만, 마지막 전시실에 다다를 때까지 마음의 울분은 그대로 존재했다. 안중근의사의 유묵은 현재 국내외 50여점 정도(국내소재 26점은 국가보물로 지정)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안중근 유묵 34점과 당대사진. 자료40여점 등 7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제작 시기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 때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 때까지 죽음을 앞둔 45여 일간 시기의 작품들이다. 유품은 유묵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유묵작품들의 수신자는 모두 일본인들이다. 때문에 작품들 말미에 한결 같이 수인(手印)과 '~대한국인(大韓國人)안중근 서(書), ~대한국인 안중근 근배(謹拜)'의 낙관이라 할 수 있는 글씨가 적혀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연추리)에 있는 단지동맹비-비석의 모양은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단지동맹비 내용-비문이 훼손돼 있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안의사의 작품들은 대부분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현실고발 등, 역사의 교훈들과 불교적 내용, 정신적 지주였던 천주교의 사상들을 담고 있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담담히 쓰여 진 작품들은 '독립. 평화' '의거. 순국' '인간 안중근'으로 구분되어 이번에 전시되고 있다. 관람자들은 전시실을 따라가며 안중근의사의 면모를 상세히 구분하며 살펴볼 수 있어서 뜻 깊다. 독립투사 이전에 '돈의학교. 삼흥학교'를 설립한 교육계몽 운동가였고 국채보상운동에도 헌신했으며 동양평화의 실천방향과 이론을 제시한 사상가였음을 가르쳐준다. 물론, 교육계몽의 한계를 직시하고, 의열투쟁으로 돌아서며 하얼빈의거로서 역사에 기록을 남기셨지만 말이다. "나의 의거는 오로지 동양평화를 도모하려는...간절히 바란다."며 동양 삼국의 화평이 평화의 길임을 역설한 '동양평화론'과 '안응칠 역사'등은 삶과 죽음, 극락과 지옥의 갈림길이었던 여순 감옥에서 상고도 포기한 채 남겨진 글이라 더욱 가슴이 아프다. 군사법정에서 한국의 의병으로서 적군의 포로가 되어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되기를 원했던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1909.10.26)와 순국(1910.3.26)100주년을 맞아 겨레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던 그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 길이 전해질 것이다. 도마 안중근, 유묵전시회, 의거.순국 100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김해자 연관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