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업발전의 진원지 농업발전에 여생을 바친 수원 속 우장춘 박사
2023-09-18 16:40:47최종 업데이트 : 2023-09-18 16:40:46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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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가 개발한 배추
서호 와 옛 농촌진흥청 (현 선거연수원)
농촌진흥청 시험답 (조선시대 둔전)
우장춘(禹長春) 박사는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 한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한 인물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한국인의 제2의 식량으로 불리는 배추와 무 김치는 우장춘 박사의 '종의 합성' 성공으로 오늘날 삼시 세끼 우리의 밥상에 오르게 되었다. 겨울양식인 배추 김장김치
우 박사는 1916년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해 1919년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1936년 5월 '종의 합성(種의合性)이라는 논문으로 도쿄 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서는 쌀과 보리만 경작했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중요한 식품인 김치를 담가야 할 배추와 무 씨앗을 일본에서 수입을 해야만 했다.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후진 농업국인 우리나라는 농업 발전을 위해 우장춘 박사 같은 농학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우 박사는 한국정부의 요청에 의해 1950년 3월 8일 한국으로 귀국한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농림부장관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부산에 한국 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 초대 소장을 지냈다.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우 박사는 장교로 입대 53년 휴전 후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 후 53년 중앙 원예기술원장, 58년 원예시험장을 지냈으며 농업 과학자로서 원예육종(育種) 사업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왔다.
우박 사는 부산에 있는 농업과학연구소를 수원(옛 농촌진흥청)으로 이전 수경시설을 만들고 김치가 중요식품인 우리의 식생활에 맞춰 배추와 무종자를 개발하는데 우선을 두었다. 우 박사는 '종의 합성' 이론으로 일본의 재래종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한국의 토양과 환경에 맞는 배추와 무 종자 개발에 성공 54년 신품종 배추와 무 종자의 대량생산으로 전국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우장춘박사가 개발한 감자를캐는 농부
우 박사는 지병인 십이지장궤양으로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959년 8월 10일 61세에 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별세 3일 전에 병실에서 대한민국 '문화 훈포장'을 받았다. 우 박사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 조국이 나를 인정했구나" 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있다.
봉분대신 상석위에 동판으로된 흉상 사진이 새겨있다 (사진: 2014년 방문때 찰영)
우장춘 박사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 문이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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