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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팔달산 고인돌을 찾아 낸 이야기
언론인 김우영
2020-03-09 18:10:03최종 업데이트 : 2020-03-09 18:07:44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팔달산 고인돌을 찾아 낸 이야기

[공감칼럼] 팔달산 고인돌을 찾아 낸 이야기

팔달산 고인돌. 사진/김우영

팔달산 고인돌. 사진/김우영

의사이자 사진작가인 고 김동휘 선생은 평생 수집한 등잔을 모아 1997년 등잔박물관(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258-9, 도로명 주소는 능곡로56번길 8)을 지었다. 그리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재단법인을 설립 했다. 지금은 아드님인 김형구 관장이 이어받아 지키고 있다. 선생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내 친한 벗들과 가끔씩 들러 정담을 나누곤 했다. 인자한 성품과 각 방면의 해박한 지식이 넘치는 선생은 우리들의 멘토이기도 했다.

어느 해 가을날이었던가. 등잔박물관 한 쪽에 있는 넓적한 돌을 보고 내가 고인돌처럼 생겼다고 하자 선생은 어느 지역 고인돌을 발굴하다가 그 밑에서 꽃 무더기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그 옛날 청동기 시대, 그리고 석기 시대에도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정든 이웃이 죽으면 이처럼 무덤 속에 꽃을 넣어 줬다는 것이다. 사람의 정이나 사랑은 지금이나 고대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며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 등잔박물관 한쪽에는 연보라색 구절초가 무더기로 피어있었다.

그 이후 고인돌을 볼 때마다 슬퍼하면서 꽃을 망자의 시신위에 올리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환상을 떠올리게 됐다.

내가 본격적으로 고인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에 발행된 화성시의 '화성군사(華城郡史)' 편찬 업무를 맡으면서다. 상임간사와 집필위원으로서 한 3년간 화성시 곳곳을 발로 뛰었다.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원고를 썼다. 이 무렵 홍신선 시인 등 화성·오산지역의 문인들도 만나 한국문인협회 화성지부를 결성하기도 했다.

화성시사 편찬 자료를 수집하다가 수청·금암·외삼미동의 고인돌 수 십 기를 확인하기도 했는데 수청리 고인돌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금암동 일대도 개발이 진행됐지만 오산시가 금암동 고인돌 공원을 조성해 보존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금암동 고인돌은 172-1번지 일대와 주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고인돌이라고 확인된 것은 9기며 2기는 추정고인돌이다.

마을 사람들은 금암동은 예부터 잘생긴 바위가 많아 '금바위 마을'로 불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금'은 단군왕검의 '검', 임금의 '금' 등 신성시되는 글자다.

전직 대학교수, 철학자, 농사꾼, 동화작가, 출판사 대표 등 다양한 호칭을 가진 윤구병 선생의 생각도 나와 같다.

"저는 책을 만들 때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가치가 있는지부터 고민합니다"라는 말로 나를 깨우쳐준 선생은 " '검'은 하늘의 다른 이름이었는데, 이것이 '감'으로도, '곰'으로도, '금'으로도, '김'으로도, '굼'으로도 소리가 바뀌지. 또 이것이 '개마'. '고마'. '구마', '구미', '금와', '기미'로도 가지를 쳤어. 우리나라 토박이 성씨 가운데 '김' 역시 하늘을 가리키는 '검'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주 김씨 시조로 알려진 '김알지'는 성이 '김', 이름이 '알지'가 아니라 '김'의 '알지', 그러니까 하늘의 아기(알지 → 아지 → 아기), 한자로는 천자(天子)를 뜻하는 말"이란 것이다.

금암리는 그러니까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곳이고 그 신성한 바위는 고인돌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신성한 바위에도 슬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옛 금암리 마을 한복판에는 집채만한 큰 고인돌이 있는데 6.25 때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기에 주민들을 세워두고 처형했다고 한다. 그때 총탄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팔달산 고인돌도 내가 발견했다. 1980년대 중반 팔달산 산책 중 중앙도서관 옆 능선길로 오르다 잠시 쉬어가려고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불장난을 한 흔적이 보였다. 바위 밑에 고여 놓은 돌이 있어서 아궁이처럼 보였던 것일까.

그런데 문득 "어? 돌을 고여 놓았구나...그럼 이게 고인돌이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달산 고인돌들. 오른쪽 뒤 건물이 수원중앙도서관이다. 사진/김우영

팔달산 고인돌들. 오른쪽 뒤 건물이 수원중앙도서관이다. 사진/김우영

그 후 나와 친분이 있었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최호림 박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조사를 거쳐 학계에 보고 됐다. 이런 사실은 당시 인천일보에도 보도된 바 있다.

최호림 박사와 나는 당시 화성문화원 조광원 사무국장과 함께 금암동 고인돌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몇 년 후 발굴조사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막걸리 한잔에 붉어지곤 하던 그의 선한 얼굴이 떠오른다.

팔달산 고인돌은 총 4기이다. 수원시립 중앙도서관 동쪽의 산기슭에 2기가 있고, 그 위 쪽 수원화성 화양루 밖 아래에 2기가 있는데 간돌칼(마제석검)도 출토됐다. 현재 경기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돼 있다.

금곡동과 이의동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됐다. 이 고인돌들은 택지개발로 인해 수원박물관과 광교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수원에서 고인돌이 발견됐다는 것은 기원전 수 천 년 전부터 사람이 마을이나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다. 고인돌은 혼자서 만들 수 없으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혜와 힘이 필요하다.

수원에서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많이 발견됐다. 대략 10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이 살아 온 수원 땅. 날이 풀리면 그 흔적을 찾아 다시 한번 수원역사여행을 떠나야겠다.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공감칼럼, 김우영, 팔달산,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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