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칼럼] 응? '수원성'을 보러 융.건릉에 간다고? 모처럼 약속이 없었던 지난 주 어느 햇살 좋은 날, 운전할 줄 모르고 차도 없는 '뚜벅이'인 내가 팔달문에서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융릉 건릉 앞에 내렸다.잘 정리된 입구를 지나 능역(陵域)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고왔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빛나는 나뭇잎들의 산들거리는 손짓과 향긋한 풀냄새로 인해 내 단순한 정신은 또 행복해졌다. 덩달아 내 몸에서도 흥이 솟구쳤다. 건릉으로 먼저 길을 잡았다. 거기에서 중간 골짜기를 건너 융릉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 펼쳐지는 풍경이 평화롭기 때문이다. 건릉으로 가는 숲길. 사진/김우영 그런데 건릉 입구 왼쪽 언덕에서 젊은 여성 둘이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저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싶었다. 경사가 제법 있는 길을 얼마쯤 걸어 올라가다가 주변의 풍경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능선엔 잘 곧게 뻗은 우리 홍송(紅松)이 멋들어지게 우거져 있는데 반해 능선 서쪽으로는 기묘하게 구부러지고 땅에 눕기까지 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융릉건릉을 감싸는 그 산책길은 최근 몇 년 간 다녀 본 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한 시간 정도면 일주를 할 수 있었는데 고요했고 아름다웠다. 올 가을 단풍이 물들 때나 겨울 눈 덮였을 때 다시 오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거기서 만난 감동은 또 있었다. 그 산책길이 나있는 북쪽 능선이 바로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이었던 것이다.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 토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사진/김우영 그러니까 옛 수원을 감싸고 있는 '수원성'인 것이다. 이곳에 능이 들어서기 전엔 수원부가 있었다. 수원관아와 관계 기관, 그리고 민가가 들어선 큰 마을이었다. 이 건물들이 모두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이사하고 성을 쌓았는데 그게 지금의 '화성'이다.'화성'은 일제시기에 '수원성'이라고 불렸다. 수원성은 따로 존재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던 중 고 이종학 선생이 수원 화성의 이름을 바로 잡는 데 앞장섰다. 화성에 관한 수많은 수집자료를 바탕으로 정부기관에 청원서를 수차례 제출하는 등 적극 노력, 결국 제 이름을 되찾게 됐다.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번지, 현재 융릉건릉을 감싸고 있는 옛 성곽은 지금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이라고 불린다. 1986년 9월 7일 경기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됐다. 고려시대에 축성됐다고 하지만 백제시기에 쌓았다는 주장도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에는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1789)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이라는 설명이 있다. '본래 낮은 산능성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이 2∼2.5m이고 높이는 4∼5m이며,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20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3500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고 기록돼 있다. 문화재청은 이 성이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하다가 행정조직상의 정비와 사도세자(후에 장조로 추존) 능 이장에 따라 사용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한다. 사실 이 곳이 성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1990년대 초 신문사 기자노릇을 하고 있을 때 취재 때문에 온 적이 있으며 20여 년 전 쯤에도 (사)화성연구회 회원들과 답사를 온 적이 있다. 그래서 한눈에 저것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성시에서는 이 산책길 정상부분에 '수원고읍성'이라는 안내판을 설치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수원사람들도 정조대왕과 사도세자를 찾아가는 길에 수원고읍성을 한번 둘러보길 바란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운치있는 둘레길 임을 장담한다.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