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을 보면서 장례문화에 얽힌 그 시대의 흔적을 보다
2015-10-10 10:46:38최종 업데이트 : 2015-10-10 10:46:38 작성자 : 시민기자 공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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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오후 팔달산 산책로를 따라 서남각루 벽 길을 걸었다. 소나무 숲이 줄기차게 늘어선 곳이다. 도심이지만 이렇게 소나무가 활기 넘치게 가지를 뻗고 싱싱한 모습은 보기 좋았다. 하늘과 맞닿은 푸른 기상이 수원을 상징하는 것 같아 기분 좋은 숲길이었다. 고인돌을 보면서 장례문화에 얽힌 그 시대의 흔적을 보다_2 수원시 팔달산 지석묘군 경기도 기념물: 제 125호 소재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산1-1 고인돌(지석묘)이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굄돌을 지상에 세워서 돌방을 이루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무덤방이 땅속에 있으면서 받침돌에 덮개돌이 놓인 바둑판식, 맨 땅 위에 덮개돌이 놓인 개석식으로 구분된다. 현재 우리나라 전역에 약 3만기 정도 남아 있다. 팔달산 고인돌은 팔달산의 남쪽 기슭에 있으며 멀리 수원 시내가 내려다보여 조망이 아주 좋은 곳에 위치한다. 팔달산에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 뒤편에 평평한 곳에 고인돌이 2기 있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 2기가 있는데 최근 이 유적 부근에서 고인돌의 덮개돌로 보이는 큰 돌들이 조사되어 더 많은 고인돌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 고인돌의 크기는 가장 큰 것이 1.8m 두께0.5m이다. 놓인 긴 방향은 남북 쪽으로 산줄기와 나란히 한 점이 특이하다. '표지판 안내문'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양편에 돌을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돌을 얹어 놓은 것으로 거석분묘라 한다. 그 속에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고 토기나 석기 등 껴묻거리를 함께 매장한 형태로 남방식이다. '이곳은 삼한시대 수원이 마한의 54개국의 모수국이었다'는 것의 궁금증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설도 있다. 팔달산의 지석묘는 바둑판식으로 평평한 곳에 거석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물론 세월이 흘러 흙으로 덮여서 그 모양을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위에 얹힌 거석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글고 두꺼운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흔히 보아온 고인돌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장례문화도 변한다. 한때는 매장문화에서 지금은 화장 문화로 바뀌고 있다. 더러는 수목장도 많이 한다. 산에 매장하여 조상을 숭배하고 묘를 돌보던 문화가 사라져간다. 풍수지리를 보고 명당을 찾던 지관의 모습도 보기 드물다. 이렇게 변해가는 세태에서 매장문화는 고대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모토가 될 것이다. 청동기시대 거석문화는 사람살이의 상징을 뜻했다는 문헌의 자료를 보면, 죽음으로 가는 길에도 돌로서 마지막을 새겼을 그 시대를 들여다보게 한다. 움을 파고 돌로 벽을 만들어 방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넣었던 석곽묘, 옹기 안에 시신을 넣고 묻었던 옹관묘, 토광묘라고 움을 파고 그 안에 시신을 묻었던 것 등등, 시대에 따라 변했던 장례문화의 발전사이다. 지금 팔달산 지석묘 군에서 보듯이 한 사람의 일생을 마치고 가는 길을 후손이 처리하는 일이다. 시대와 신분에 따라 무덤의 양식도 달랐을 것이다. 고인돌에 대한 문헌을 찾다가 지난 2002년 9월 경기도 파주의 지석묘에서 세계최초로 임신한 여성의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사망한지 무려 430년이나 지났고 뼈밖에 남지 않은 미라였지만 최신 다중채널 컴퓨터 단층 촬영장비를 이용해 사인이 자궁파열임을 알아냈다. 고인돌을 보면서 장례문화에 얽힌 그 시대의 흔적을 보다_3 수백 년 동안 공기와 차단되어 있던 미라이다. 모자미라는 공기가 차단된 관속의 물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공기와 차단되어 있던 관을 열면 부장품으로 들어있던 옷가지들의 색깔과 인종의 후궁인 숙빈이 쓴 한글편지도 출토되어 미라의 신분확인에 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고대의 매장문화를 통하여 바라본 그 시대의 당대의 역사를 증명하는 물건들이다. 그러므로 미라는 타임캡슐이다. 대다수가 알려지지 않고 화장이나 재매장 되는 경우가 많다. 후손들에 의해 모자미라처럼 기증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란다. 앞으로 매장문화는 사라져가는 추세이다. 모자미라의 기사를 읽으면서 전에 시댁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구문천리 일대에 제약회사가 자리를 잡을 때였다. 종산을 제약회사에게 팔게 되었다. 그때 윗 대손 묘지가 거의 그곳에 안장되었기에 유골을 채취해 화장을 할 때였다. 많은 기 중에 한기만 돌아가신지 10년도 넘었는데 썩지 않고 물에 관이 잠겨있었던 것을 보았다. 물론 우리는 가까이 가서는 못 보았지만, 수맥이 흐르는 장지라서 그렇다고 하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십년이 넘도록 관과 베옷도 썩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기는 뼈만 남아서 그 자리에서 화장을 해서 옹기에 담았지만 그 어르신의 기는 화장터로 갔던 것이 기억난다. 어쩌면 묘 안의 습도와 공기의 밀착으로 인해 시신이 썩지 않을 정도의 기운이 서린 곳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었던 일이다. 고인돌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니 매장문화가 주는 장점도 있음을 본다. 박물관에서도 보기 어려운 역사의 흔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장례문화를 접하면서 생각해본다. 나는 이후에 내 생애에서 가장 즐겁게 살아온 시민기자생활을 책으로 엮고 싶다. 언제까지 할지 모르지만 화장하지 말고 매장할 때 관속에 이 책을 넣어가고 싶다. 기사를 쓰기 위하여 열심히 돌아다녔던 시간들, 고민하고 메모하며 지냈던 건강했던 삶을 캡슐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팔달산의 지석묘 군을 보고 내려오면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을 본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한 세월의 뒤안길이다. 어느 날일까 이처럼 후세 사람들로 인하여 발견되는 고인돌처럼, 우리네 삶 역시 시간이란 바퀴아래 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지고 온 고인돌 위에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이었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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