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청 폐청 100주년…일제, 민족문화말살 노리고 맥 끊어
전국 재인 수 당시 4만여명 달해, 현재 예총이나 민예총 능가…주 활동 무대 수원화성
2020-01-13 16:05:20최종 업데이트 : 2020-01-14 09:46:13 작성자 : 시민기자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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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용우에게 학습한 군웅춤을 추고 있는 경기도당굿 보유자 고 오수복 수원은 우리 전통문화의 중심지였다. 한 때 수원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이 집약된 곳으로 전국을 누비는 재인들이 모두 수원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그런 수원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전통문화와는 거리를 두고 서구문화에 치중한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지역이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산실이요 수백 년 동안 전통문화를 이어가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작금에 들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내팽개친 꼴이 되었다.
과거 일제치하에서도 수원은 우리나라 모든 재인이 거쳐 가던 곳이다. 재인청은 광대청(廣大廳)·장악청(掌樂廳)·신청(神廳)·풍류방(風流房)·공인청(工人廳)이라고도 하였다. 한말 재인청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삼도에 두었는데, 경기도의 재인청은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현 오산시 부산동)에 있었다.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우리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재인청이 폐청됐다. 폐청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해있던 재인의 수는 전국에 4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1925년 당시 인구 1299만7611명) 그 방대한 조직은 현재의 예총이나 민예총을 능가하는 대단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재인청의 조직을 관리하던 곳이 바로 삼도의 재인청 중 당시 수원군에 소재하고 있던 경기재인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재인청 직제는 도 재인청을 비롯해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 하고, 군 소재 재인청의 우두머리는 청수(廳首)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 도 재인청의 총수였던 대방의 아래 두었던 각 도의 책임자인 도산주(都山主)로부터 행정적인 지시를 받았다. 어느 지방이던 재인청에 매였던 광대나 재인들의 행정적인 업무는 청수가 거느린 공원(公員)과 장무(掌務)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고 이용우가 생전에 추던 터벌림춤을 추고 있는 경기도당굿 이수자 까다로운 규제 속에 생활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지금도 경기도 내의 여러 곳에 보면 광대마을, 혹은 재인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지난 날 군 재인청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재인청이라는 곳은 춤을 추거나, 단지 소리를 하거나 하는 예인의 집단이 아니다. 재인청이란 한 마디로 3도에 있던 모든 예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거대한 기, 예능조직이었다는 점이다. 아키바 다카시의 <조선 무속의 연구>에 의하면 대방의 선출은 재인청 인원 중에서 3명을 추천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도 상당히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은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모든 재인(광대, 재인, 소리꾼, 화랭이, 춤꾼 등을 합친 모든 예술인)들을 총괄하는 자리였으며, 그 밑에는 좌우도산주가 있어 재인들을 관리했다. 4대째 수원에서 가계로 전승된 경기안택굿을 하고 있는 고성주 명인 재인청의 폐청으로 뿔뿔이 흩어진 재인들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년에 걸쳐 경기, 충청, 전라 삼도에 존속했던 재인청은 폐청 이후 제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자신이 배운 학습을 이용해 단체를 조직해 맥을 이어갔다. 그들 중 일부가 오산 부산리에 거주하던 이용우 가계로 12대 째 대를 물린 전형적인 산이계열의 집안이다.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의 경기재인청 도산주인 이종하의 집에는 『경기도 창제도청안』1책, 『경기도 재인청 선생안』 1책, 『경기도 창재청』 2책이 있어서,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 년에 걸쳐 재인청에 소속되었던 재인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우리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 활동무대는 수원화성이었다. 이렇게 방대한 조직으로 운영되던 재인청이 사라지고 난 뒤, 현 수원화성행궁 운한각 옆 풍화당에 거주하던 고 이동안은 이곳에서 재인청 춤 선생인 스승 용인춤꾼 김인호로부터 전수받은 경기재인청춤을 제자들에게 전승시켰다. 또한 이용우도 수원영동거북산당을 근거지로 경기도당굿을 전승시켰으며 인천 동막, 부천 장말 도당굿 등에서 지역에 전승되던 전통예술을 이어나갔다. 고 운학 이동안춤보존회원들이 고 이동안 선생이 추던 신칼대신무를 추고 있다 하지만 재인청이라는 거대한 민간예술조직이 와해되고 난 후 기능을 가진 각 예인들은 파별로 전통문화를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이용우와 이동안의 예술세계는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산주 이종하의 아들 이용우는 많은 재인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경기도당긋이 1990년 10월 10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화성출신 이동안 역시 경기도재인청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춤으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 이동안은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손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화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 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동안은 용인의 재인청 춤꾼 김인호로부터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북)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는 줄타기를 전수받았다. 하지만 그는 춤으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로 지정받았다. 고 이동안의 발탈 연희 소도구 (수원문화재단 기획전에서) 재인청 폐청 100년의 아픔, 이제 수원에서 되살려야 한다 이렇게 많은 뛰어난 예능을 보유하고 있던 재인들이 모인 경기재인청. 이동안이 수원화성 운한각 풍화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수원은 전국의 수많은 예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런 경기재인청이 폐청된지 올해로 100년. 그 100년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일 년 동안 수원에서 무대에 오르는 전통공연을 보면 미비하다. 그래도 이용우 가계와 이동안 가계로 이어진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몇몇 후학들이 애를 쓰고 있지만,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지원은 극히 미비한 상황이다. 40여 년 동안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매년 공연을 두 차례씩 벌이고 있는 안택굿 명인 고성주는 한 번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늘 자비를 들여 무대를 마련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국의 수많은 전통예술인들을 관리하고 전통문화를 지켜왔던 경기재인청. 그 중심에 있던 수원으로서는 재인청 폐청 100년이 지난 2020년을 맞아 수원의 정신적 중심으로 남아있는 경기재인청에서 이어진 전통예술을 찾아 그 정체성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경기재인청, 수원의 전통예술, 정체성, 수원화성, 대방, 고 이용우, 고 이동안,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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