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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honey] '조선 팔경' 백암산 백양사
2025-12-03 09:54:10최종 업데이트 : 2025-12-03 08:00:05 작성자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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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화' 상징 쌍계루 품은 애기단풍 명소 (장성=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빨리 가면 30분, 천천히 가면 10분'. 애기단풍 최고 명소인 전라남도 장성군 백양사에서도 풍광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약사암으로 가는 가파른 길에 세워진 이정표이다. '이게 무슨 말?' 하는 질문이 뇌리를 스치지만, 천천히 가도 30분이면 도착한다는 뜻을 담은, 발랄한 표현임을 이내 알겠다. ◇ 생각하며 걷는 오르막길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말 아닐까. 오르막길 초입에서 약사암까지 600계단, 백학봉(해발 730m)까지는 1천670계단이 놓여 있었다. 백학봉은 웅장한 기운이 넘치는 큰 바위 봉우리이다. 최고봉인 상왕봉(741m), 사자봉(723m)과 함께 백암산의 3대 봉우리를 이룬다.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학바위라고도 불린다. 삼국 시대부터 전란, 가뭄, 질병 등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임금이 관리를 파견해 제사를 올렸던 명산이다. 지금도 백양사 뒤 산 중턱에 국기단이 마련돼 있다. 대덕 고승을 배출한 약사암은 백양사의 전설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 선조 때 환양 선사가 스님들에게 설법할 때 흰 양이 이를 함께 듣고 천상에서 환생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양사 이름은 이 전설에서 유래했다. 백양사 단풍나무 터널에 들어서면 백학봉이 나그네를 압도한다. 수직으로 솟은 백학봉은 백양사를 굽어 보고 있다. 노령산맥 끝자락에서 호남평야를 마주하고 솟아오른 백암산은 전라남·북도의 경계를 이룬다. 입암산, 전북 정읍시 내장산과 함께 1971년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양사 입구에 '조선팔경 국립공원 백암산 백양사'라고 적힌 표석이 서 있다. 내장산국립공원 안에서도 조선 시대부터 경승으로 이름난 곳임을 드러낸다. ◇ 수령 800년의 갈참나무 노거수 백암산은 자연이 잘 보존된 곳으로 평가받는다. 백양사로 이어지는 단풍나무 터널 중간중간에 선 갈참나무들은 밑동 둘레가 3∼6m가량 되는 듯, 굵직굵직하고 키가 컸다. 수령 300∼800년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다. 먹거리, 땔감, 건축 재료 등으로 애용돼 국내에 오래된 참나무가 드문 것을 고려하면 갈참나무 고목이 군락을 이룬다는 사실이 놀랍다. 할아버지 나무로 불리는, 800살가량의 갈참나무는 일주문과 쌍계루를 잇는 길 중간쯤에 우뚝 서 방문객을 반겼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참나무이다. "이렇게 큰 나무는 생전 처음 보네" "둘레가 세 발은 되겠어". 할아버지 나무를 보고 관광객들이 내지른 탄성들이다. 백양사 일대를 비롯해 백암산에는 약 300㏊에 이르는 드넓은 면적에 비자나무 1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주목과에 속하는 비자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사랑받으며 열매는 약제, 기름 등으로 사용된다. 비자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테르펜 등 살균 물질은 사람 몸의 자율신경을 진정시키고 건강하게 한다. 1962년 이곳 비자나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때만 해도 백암산은 비자나무 생장 북방한계선으로 여겨졌으나 기후 변화로 인해 이 한계선은 조금씩 북상하고 있다. 비자림은 제주도, 전남 해남·고흥·화순·장성, 전북 정읍 등 주로 남부지역에 분포한다. 이중 백양사 비자나무 숲이 가장 크다. 백암산에는 굴거리나무 군락도 있다. 새잎이 난 뒤에 전년도의 잎이 떨어져 나가는 이 나무는 자리를 물려주고 떠난다는 뜻에서 교양목(交讓木)이라고 불린다. 백암산 굴거리나무 군락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 '조선 팔경' 쌍계루 뒤로 백학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두 계곡이 만나 이룬 연못을 내려다보는 쌍계루는 '조선 팔경' '대한 팔경'으로 불렸다. 오색으로 물든 애기단풍에 둘러싸인 쌍계루가 수면에 비치는 모습은 사진작가들을 매혹하는 비경이다. 쌍계루는 운문암 계곡과 천진암 계곡이 만나는 곳에 서 있다. 고려 시대(1350) 각진국사가 세웠으나 큰비로 무너진 뒤 1377년 청수 스님이 다시 건립했다. 조선 왕조의 정치적 설계자인 삼봉 정도전이 기문을 썼고, 목은 이색이 '쌍계루'라고 이름 지었다. 고려의 '충절' 정몽주가 시를 지으면서 쌍계루는 더 유명해졌다. '지금 시를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만나/붓을 잡고 끙끙거리니 글재주가 부끄럽네/청수가 누각 세우니 그 이름 소중하고/목은 선생이 기문 지으니 가치 더해지네/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은 붉고/달그림자에 배회하니 가을 물은 맑네/오랫동안 인간사 시달렸으니/어느 날 소매 떨치고 그대와 오르리.' 퇴락해가는 고려와 그 임금을 그리는 애틋한 심정을 정몽주는 이 시에 담았다.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많은 학자, 문인, 승려, 현인들이 쌍계루를 소재로 시를 짓거나 글을 남겼다.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노사 기정진, 사가 서거정, 월성 최익현, 만해 한용운, 서옹스님 등 200여 명이 남긴 시는 400여 수에 달한다. 한시를 쓰고 읊을 수 있는 마지막 관리로 불렸던 조순 전 부총리의 시도 누각 현판에 적혀 있었다. 쌍계루가 종교와 사상, 시대를 초월한 소통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백양사는 잎이 작고 색이 고운 애기단풍 명소다. 올해는 유난히 길었던 여름 탓에 단풍이 늦게 찾아왔다. 백암산 고지에서 시작된 단풍은 쌍계루를 향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단풍 철이면 백양사 템플스테이 참가자가 증가해 평일에도 빈방이 없다. '지각 단풍'에 아랑곳하지 않고 줄 잇는 방문객 중에는 낯선 언어를 쓰는 외국인도 적지 않았다. 한국 전통문화를 실감하기에 절집보다 나은 곳이 몇이나 될까 싶다. 그만큼 사찰에는 불교 문화재뿐 아니라 문학, 서예, 조각, 공예, 음식 등 전통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유산이 풍부하다. 백양사에는 소요 대사의 사리를 모신 범종형 사리탑, 극락보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유물 등 3건이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돼 있다. ◇ 고불총림도량과 고불매 백암산과 백양사의 경승을 예찬한 글은 풍성하게 전해 온다. 정도전은 "석벽이 깎아지른 듯 험하고 산봉우리가 중첩하여, 맑고 기이하며 큰 모습이 실로 한 곳의 명승지가 될 만하다"고 했다. 독립운동가, 교육자, 국학자였던 정인보 선생은 "백양사는 본래 기이한 승경을 독차지하고 있는데다 건물과 구조가 그윽하고 아담해 산수와 걸맞다"고 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18교구 본사로서 장성, 영광, 담양 지역의 사찰을 말사로 하는 백암사는 1천400여년 전 백제 무왕 때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고려 각진국사, 조선 시대 서산대사의 전법 제자인 소요 태능 스님, 조선 시대 환양 대사, 근대 만암 스님, 조계종 5대 종정 서옹 스님 등 큰 스님들을 배출했다. 이 중 만암 스님(1876∼1956)은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사찰 재정자립을 위한 선농일체 실천, 불교 정화를 통한 조선 불교의 정체성 확립 등으로 한국 불교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백양사에서 '호남고불총림'을 결성했다. 선원(참선 기관), 강원(승려교육 기관) 등을 갖춘 불교 종합수행도량인 총림이 한국에서 만들어지기는 처음이었다. 이는 백양사와 호남 불교 발전으로 이어졌다. '고불'(古佛)이란 부처의 원래 가르침을 뜻한다. 만암은 승려들에게 양봉기술을 익히고 직접 농사짓게 하는 등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원칙 실행으로 주목받았다. 광복 후 조계종 종정에 추대됐으며,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냈다. 쌍계루를 지나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만암대종사고불총림도량'이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비좌에는 '이뭣고'라고 쓰여 있다. 만암 스님이 '참 나'를 깨닫기 위해 '이뭣고' 화두를 참구한 지 7년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에서 연유한다. 백양사를 찾는 참배객이 빠지지 않고 찾는 나무가 있다. 고불매라고 불리는 매화나무이다. 수령 370년가량의 고목이지만, 봄이면 싱싱하고 고운 담홍색 꽃을 피운다. 만암 스님이 고불총림을 결성할 때 이 나무가 고불의 기품을 닮았다고 하여 고불매라 부르기 시작했다. 백양사의 산내 암자로는 약사암 외에도, 금강산에 있던 마하연과 함께 최고의 선방으로 꼽혔던 운문암, 사찰음식의 대가 정관 스님이 주지로 있는 천진암의 명성이 높다. 백양사는 애기단풍이 물드는 가을에만 정취가 넘치는 게 아니다. 파스텔을 칠한 듯 신록 색깔이 곱고 다채로운 이른 봄, 함박눈이 쌓이는 겨울, 녹음 짙은 여름 등 계절 변화가 뚜렷하다. 대웅전 마당 귀퉁이에서 백학봉을 올려다보고 선 고불매는 변화를 멈추지 않는 백양사의 사계를 지켜보고 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 [여행honey] '조선 팔경' 백암산 백양사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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