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대문이 부서질듯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 연세가 70대 중반은 되어 보이시는 노 부부가 대문을 닫고 나서자 곧바로 그의 아들인 듯한 중년의 남자가 뛰어 나와 어르신의 팔꿈치를 붙잡고 사정을 한다.
"아버님. 왜이러세요. 잠깐 화를 푸시고 들어가세요. 이 추운데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눈길에 낙상이라도 당하시면 어쩌실라구요. 일단 들어 가시고 말씀 하세요."
"놔둬라. 내가 택시타고 가면 그만이다. 둘째네로 갈테니까 알아서 혀라. 내가 늬덜한테 못해준게 뭐 있냐? 늬덜 그렇게 가르쳤더냐? 나쁜것들. 너 앞으로 에미한테 전화도 할 필요 없어"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엊그제 퇴근길에서 본 일이다. 골목길을 접어 들어 가는데 길가 주택에서 나오신 노 부부와 그 아들과의 대화. 아버지는 그냥 가시겠다고만 했지만 어머니는 그 말씀 속에서 노여움과 분노가 절절히 일어나는 듯 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제 3자인 나와 다른 행인들이 보는 골목길에서 그렇게 쏘아 붙였을까.
대강 짐작컨데 집 안에서 노부모님과 아들 당사자는 물론 그의 며느리와 어떤 일이 벌어진게 분명했다.
그게 부모님을 모시는 일에 관한 것일수도 있고, 돈 문제, 아니면 주택문제나 조상님 모시는 제사문제, 문중의 땅 문제 등일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다른 형제와 관련된 일이거나...
나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자면 대체로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둘째네 집으로 가신다고 한걸 보면 그는 큰아들이 틀림 없었다.
남의 가정사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기에는 좀 죄송하지만 그날 날씨가 영하 10도 아팎으로 떨어져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선 시간이 저녁 8시쯤이 다 돼서였던걸 생각해 보면 두 어르신이 화가 나도 한참 나신거였다.
진정 무엇이 그분들을 그렇게 노여웁게 만들었던지간에 가족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봤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이런 뻔한 질문을 일컬어 우문이라고도 하겠지만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일이 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식은 어버이를, 어버이는 자식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는데 그 기본 원천이 바로 가족 아닌가. 가족은 그만큼 우리가 일평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의 가족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가족의 의미가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모습은 과거와 너무나 큰 차이를 갖는다.
가족을 질로 평가한다면 정말 질 높은 가족은 어떤 경우인가.
예전 사고방식대로라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즉, 위엄 있는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효심 지극한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
하지만 이는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된지 아주 오래되었다.
지금은 가족의 친밀감보다는 마치 물질적인 외적 조건이 가족의 행복과 불행을 가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부모의 개념 역시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보인다. 좋은 부모란 자식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안겨주지 않는 부모이며, 아울러 자식 역시 성공한 자식이 좋은 자식 축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역시 질 높은 가족은 돈 잘 벌어서 아이들에게 주는 부모도 아니고, 명문대 나와서 좋은데 취직해서 돈 잘 버는 자식이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다.
가족간에 분쟁으로 인해 피튀기는 법적 다툼을 벌이고, 아예 인연마저 끊어버린 후 왕래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는 재벌들을 보면 역시 경제적인게 다는 아니다.
가족은 각박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샘과 같다.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아 우리가 겪는 정신적 갈증을 해결해줄 가장 친밀한 관계로서의 가족.
가족은 한마디로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가장 단단한 성벽이고, 가장 따스하고 포근한 침실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가족이 잘 영위되려면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존경과 효를 다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필수적인 노력은 가족 간의 믿음과 끊임없는 대화일 것이다. 믿음은 대화를 통해서 발생하며, 또한 대화는 믿음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진실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들부터, 오늘 당장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과 함께 시시콜콜한 오늘 하루의 일들을 이야기 나누어 보자. 하다 못해 아들이 요즘 즐기는 게임은 무엇인지도 묻고, 딸내미가 좋아하는 아이돌그룹 가수는 누구인지.
부부간에도 아내는 남편의 발 뒷꿈치에 더덕더덕 엉겨 붙어 있는 굳은 살도 좀 파내 주고, 남편 역시 아내의 손을 잡고 주말에 영화라도 한편 같이 보자.
어른이니까 "에헴"하면서 무게만 잡을게 아니라 자녀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나눠보자. 마음의 대화가 가족의 행복을 지켜줄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