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지만, 그리움은 영원히
순국선열의 날에 만나는 수원의 영웅들
2021-11-16 10:20:57최종 업데이트 : 2021-11-16 13:11:39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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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산 서장대에 오르는 입구에 '산루리 영웅들'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에는 이선경, 박선태, 김노적, 이현경의 사진과 업적이 쓰여 있다. 11월 17일은 82회 순국선열의 날이다. 1905년 11월 17일에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찬탈당했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매년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추모행사를 했다. 이후 199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고 있다. 일제의 국권 침탈 전, 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가 순국한 인물들을 추모한다. 순국선열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그들이 남긴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는 의미가 있다. 수원 화성에서 우측으로 걸으면 공방이 늘어선 거리에 들어선다. 이 길을 걷다 보면 팔달산 서장대에 오르는 입구를 만난다. 여기에 '산우리 영웅들'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에는 이선경, 박선태, 김노적, 이현경의 사진과 업적이 쓰여 있다. 을사늑약 후 국권피탈이 자행됐다. 1910년대 이후 수원에도 많은 일본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원역을 중심으로 향교로와 매산로로 이어지는 곳에 일본인 시가지가 형성된다. 이 지역은 화성 화양루(華陽樓) 아래에 있어서 산루리(지금의 중동, 영동, 교동 등 팔달문 밖 마을)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일제의 침탈이 일어났다. 일제는 조선인을 탄압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우리 젊은이들은 매일 식민지의 참혹한 현실을 봐야 했다. 평화롭게 살던 산루리 사람들은 일제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고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수원 구 부국원 앞에 있는 수원 성공회 교회. 이선경, 이현경, 이용성 삼 남매와 인연이 깊은 교회다. 삼 남매의 부모는 교인이었고, 이현경은 성공회 운영한 진명학교 출신이다. 삼 남매는 교회에서 박선태, 김노적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안내 표지판에 처음으로 기록돼 있는 이선경도 이곳 출신이다. 이선경은 산루리에서 통학하며 공부했다. 서울에서 학생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1920년 8월 9일 상해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경성에 머무르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당했다.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9일 뒤 세상과 이별했다. 일제의 폭력적 고문 때문이었다. 100년 전인 1921년 그때 나이 19살이었다. 사진도 하나 남기지 못하고 갔다. 조국 독립을 염원하다가 겨레의 꽃이 됐다. 그래서 표지판에는 얼굴 대신 꽃이 그려있다. 눈빛이 당당하게 보이는 이현경은 이선경의 언니다. 일본 유학 중에 3·1운동 2주기를 맞아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체포됐다. 전국적인 여성운동 조직인 근우회에서 민족 계몽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중국 망명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참고로 이들 자매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이용성이다. 그 역시 1930년대 수원청년동맹, 수원체육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수원 구 부국원. 과거 산루리 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산루리 삼 남매의 독립운동'이라는 작은 전시회가 28일까지 열리고 있다. 박선태도 산루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수원에서 '대한신보' 등을 배포하며 독립의식 고취를 위해 힘썼다. 조직적인 활동을 위해 비밀 결사 구국민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활약했다. 이선경을 비롯해 이득수, 임순남, 최문순, 차인재 등 수원에서 서울 학교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조직원이었다.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과 대한민보, 애국창가 등을 수원 읍내에 배포하고 검거되기도 했다. 김노적 역시 산루리 태생이다. 스승 김세환의 지도로 수원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초대 신간회 수원지회장을 역임하며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중경으로 옮긴 임정에 참여하고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광복 귀국 후 긴 투병 생활 끝에 남수동에서 서거했다. 팔달문에서 종로 여민각 쪽으로 걸으면 길가에 '김세환 집터' 표지판이 보인다. 김세환은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부임해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다. 김세환(1889~1945)도 수원의 독립 영웅이었다. 그는 지금의 북수동 수원 종로교회 전신인 감리교회에서 교육가로서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웠다. 삼일여학교와 수원상업학교 등 교육자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부임해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세환은 수원과 충청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팔달문에서 종로 여민각 쪽으로 걸으면 길가에 '김세환 집터'(팔달구 정조로 792) 표지판이 보인다. 손병희 등 48인 판결문과 법원 신문조서 등에 당시 주소지 기록으로 김세환의 집터임을 확인한 것이다. '산루리 영웅들'이라는 표지판에서 향교 쪽으로 걷다 보면 수원 구 북구원 건물을 만난다. 이 건물도 굴곡의 역사를 품고 있다. 이곳에서는 '산루리 삼 남매의 독립운동'이라는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11월 28일) 있다. 수원박물관에서는 2021년 4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수원 산루리의 독립영웅들'을 전시했다. 이선경을 비롯한 수원 산루리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전시회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관련 유물·자료 등 100여 점이 관람객의 발길을 끌었다. 전시회는 끝났지만, 이와 관련한 영상을 박물관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참고로 순국선열의 날은 6월 6일 현충일과 차이가 있다. 현충일은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이의 충성을 기념하기 위한 법정 공휴일이다. 이날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는 물론 6·25 전쟁 참전용사 등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전몰한 장병들을 기리고 얼을 위로한다. 현충일과 순국선열의 날은 국권 회복에 헌신하고, 희생하신 정신을 기리는 날이라는 의미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순국선열의 날, 을사늑약, 산루리, 만세운동, 현충일, 윤재열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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