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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參戰) 노병(老兵)은 지금도 나라걱정 한다
전쟁을 겪지않은 세대들의 우려되는 안보의식
2022-06-28 10:41:12최종 업데이트 : 2022-06-28 13:52:28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미군들이 적진을향해 포사격을하고 있다 사진출처:참전유공자 수원지부 전시

미군들이 적진에 포사격을하고 있다. (사진출처: 참전유공자 수원지부 전시)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2년이다.
1950년 6월 25일 조선 인민군들이 일으킨 남침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할 때까지 우리 군과 유엔군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밤낮없이 격전(激戰)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 국군 13만 7천899명과 유엔군 4만 790명이 전사했다. 10여만 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민간인 피해는 학살 폭격 등으로 60여만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등 희생자 수는 100여만 명으로 추정한다. (용산 전쟁기념관 자료)

그렇게 많은 희생이 따랐는데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휴전상태로 69년째 남북 간 군사 대치를 하면서 참전 유가족들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6.25를 맞이 했다.

청소년 시절 6.25 전쟁을 겪은 필자는 현재 e수원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국군들이 전장(戰場)에서 겪었던 전쟁의 참혹함과 생사의 갈림길에서 나라를 지켜낸 참전용사를 만나 무용담(武勇談)을 쓰려고 청개구리공원을 몇 차례 방문한바 있다.

 

청개구리 공원에는 나무 그늘이 좋고 곳곳에 쉼터가 있어 노인들이 더위를 피해 여름나기 이용을 많이하는 곳이다. 몇몇 노인들을 만나봤지만 6.25 참전용사를 만나보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다. 6.25 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은 대다수 90세가 넘는 고령자다 보니 대부분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한여수 노병

6.25 전쟁에 참전한 한여수 노병. 가슴에는 무공훈장, 목에는 참전유공자 메달이 걸려있다


25일 11시 반쯤 청개구리공원을 다시 찾아갔다. 점심때라 그런지 노인 한분만이 나무 그늘 쉼터에 앉아 있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갔다. 가서 보니 왼쪽 가슴에는 훈장 같은 것이 달려있고 목에도 훈장 같은 메달이 걸려있다. 

"어르신 6,25 참전 훈장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결국 참전용사를 만나 무용담도 듣고 인터뷰도 헀다.


"가슴에 있는 훈장은 무슨 훈장인가요?"하고 물었더니 이것은 "무공훈장(武功勳章)이고 목에 건 메달은 참전 용사 메달"이라고 한다. "평소에도 훈장을 달고 다니시나요"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오늘은 그냥 달고 나왔어요."라고 하신다. 오늘 훈장을 달고 나오신 것을 보면 전장(戰場)에서 겪었던 참혹한 일들을 잊지못하신 것 같다. 필자와의 만남도 우연이라기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백마고지(白馬高地) 전투

"어디에서 사세요"하고 물었더니 율전동에 사는 한여수(95세)씨라고 한다. "군대는 어떻게 입대하게 됐나요" "고향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강남리인데 전쟁이 난 그해 9월 소집영장을 받고 입대했다"라고 한다. 군산에서 하룻밤 자고 미군이 제공한 수송선을 타고 제주도 제1훈련소에 입대 3주간의 사격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선으로 배치됐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백마부대 9사단 30 연대 2대대에 배속됐다. 곧바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백마 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大馬理) 서북쪽 해발 395m의 낮은 산에 불과하지만 광활한 철원평야와 서울로 통하는 도로가 국군의 중요 보급로로 지리적으로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이곳은 9사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공군이 395 고지를 탈환하려고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였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 395 고지를 사이에 두고 총공세에 나선 중공군과 12차례 전투를 벌이면서 포사격을 하고 수류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고지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고지를 무려 7차례나 빼앗기고 빼앗는 치열한 전투였다.

포탄 소리와 수류탄 터지는 소리에 귀가 먹먹하고 총알이 핑핑 날아오는데 함께 돌격하던 전우들이 퍽퍽 쓰러지는 것을 보면 눈이 뒤집혀 적개심(適慨心)에 불타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돌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중공군 3개 사단이 인해전술로 물밀듯 밀려오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공군이 395 고지에 얼마나 많은 폭탄을 투하했는지 고지가 하얀 흙먼지만 푸석거리는 민둥산이 된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처럼 보여 이때부터 395 고지를 '백마고지(白馬高地)'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전투로 인해 9사단은 3천4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중공군도 1만여 명의 사상자와 포로가 되었다. 백마고지는 미공군의 지원으로 9사단이 장악했다.

 

오성산(五聖山) 전투

오성산은 철원군 근동면 근북면 경계에 있는 해발 1000m가 넘는 산으로 휴전선 이북지역에 위치해 있다. 6.25 전쟁 때는 전략적 요충지로 우리 국군과 중공군이 김화지구 전투가 벌어진 격전장이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 공격으로 미군과 국군이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 오성산이라고 한다. 오성산에는 중공군이 판 요새화(要塞化) 된 땅굴이 있다. 전쟁 당시 김일성이 "국군 장교 한 트럭을 가져다줘도 오성산과는 안 바꾼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한다.
 

중공군들이 공격해올떄 꽹과리와 피리를 불며 아군을 혼란스럽게 한다

중공군이 꽹과리와 피리를 불며 성동격서 전략으로 아군을 홀란스럽게 한다 사진출처: 용산 전쟁기념관


오성산을 탈환하기 위해 고지가 약 2m정도가 낮아질 정도로 미공군이 맹폭격을 했지만 아군이 탈환을 못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할 때도 오성산은 포기하고 북진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아군을 홀란스럽게 하면서 인해전술로 공격해 온다고 한다. 중공군은 손자병볍(孫子兵法)에 나오는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내고 서쪽에서 공격한다는 뜻) 전략을 쓴 것이다. 중공군 3만 5천 명이 대공세를 펼친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무려 40여 일 간 격전을 벌여 우리 군도 5천여 명이 전사하고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의 폭격으로 중공군도 1만 4천여 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됐다.

 
"수많은 전투를 겪으시면서 죽을 고비도 수 없이 넘겼을 텐데 부상 입은 곳은 없나요"하고 물으니 노병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지금의 심정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은 수천 명이 전사하고 부상을 입었는데 나는 부상 하나도 없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죠"라고 하신다.

 

"제대는 언제 하셨나요?" "휴전하던 해 10월에 제대를 하고 제대 후 고향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살다가 30여 년 전 수원으로 이사와 공사장 등을 전전하면서 살아왔다"라고 한다. "참전유공자에 대한 보상금은 얼마나 받으시나요" "참전유공자 예우로 명예수당이 나오는데 몇 푼 안돼요"라면서 금액은 말씀하시지 않는다.
 

"슬하에 자녀는 몇이나 두셨나요" "4남 1녀를 두고 부인은 오래전 사별해 지금은 혼자서 전셋집(전세금 3600만 원)에서 살고 있다"라고 한다. "자녀들이 생활비 도움을 주나요?" 하고 물었더니 "자녀들도 손자손녀들 교육비 등 생활이 빠듯해 도움을 받지 못한다며 생활비는 노령연금, 유공자 명예 수당 등으로 생활하고 있다"라고 한다. 참고로 월남전에 참전한 지인에게 알아보니 6.25 참전유공자 명예 수당은 2022년부터 1만원 인상되어 매월 35만원이 지급된다고 한다.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참전 노병으로 정부나 국민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라고 했더니 "전쟁은 군인들만 싸우다 죽고 사는 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희생이 더 크다"라며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은 평화와 자유에만 익숙해져 전쟁에 대한 공포를 모르고 너무 아닐한(태평하다는 뜻)생각 때문에 우려스럽다"라고 나라 걱정을 하신다. "정치인들은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기보다 당리당략이나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것 같다. 잘 좀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하신다. 

 

6.25 전쟁은 우리 국민들에게 뼈아픈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들과 사회단체들은 좌우로 갈려 이념투쟁을 하고 있다. 참전용사들의 호국정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경제적 풍요와 자유를 누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국민들은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생존한 참전용사들의 남은 여생(餘生)을 성심껏 돌봐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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