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문인들이 사랑했던 시인 '노작 홍사용'
역사에서 잊혀 가던 '노작 홍사용'의 묘역에 시비를 세우다
2023-09-18 13:32:09최종 업데이트 : 2023-09-18 13:32:07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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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 홍사용 묘역. 왼쪽 시비에는 노작의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새겨져 있다. 수원문인협회의 오래전 흔적이 남아 있는 노작 홍사용 문학관을 방문했다. 초입에 들어서니 아담한 건물이 보인다. 반석산에 안겨 있는 작은 문학관이다. 먼저 문학관 옆으로 올랐다. 홍사용 시비를 보기 위해서다. 키 큰 나무들이 비를 맞고 있다. 오르는 길은 잘 꾸며져 있다. 비가 오는 틈에 두꺼비들이 많이 나와 있다. 조금 오르니 홍사용의 묘역이 보인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 다양한 문예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면서 지역 문화의 소통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부인과 함께 잠들어 있는 묘역은 생각보다 아담하다. 왼쪽 시비에는 노작의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뒤편에는 취지문이 있다.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자 향인의 뜻을 모아 이 시비를 마련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창식 시비 건립위원회 위원장부터 시비 건립에 성금을 낸 사람들이 대부분 수원 문인들이다. 故 정규호 및 이재영, 안익승이 보이고, 지금도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윤수천, 임병호, 양승본, 김우영 등도 이름을 올렸다. 모두 맑고 정의로운 사람들로 후배에게 본보기가 되는 분들이다. 시작은 1983년 11월 15일 레스토랑 상아 그릴(수원상공회의소 지하)에서 했다. 수원문인협회 회원이 중심이 되어 시비 건립 대회를 열었다. 당시 발기 취지문에 "노작 홍사용 선생은 경기도 옛 수원군에서 태어나신 시인으로~"라고 시작한다. 이듬해 1984년 5월 26일 화창한 봄날에 제막식을 했다. 한국문인협회 간부들과 홍사용의 유족도 함께했다(《수원문학, 어제와 오늘》 수원문인협회 발행, 참고). 1층 입구에 백조 창간호 복제본. 당시 편집인은 홍사용이었지만,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고 발행인은 외국인이 했다. 시비 건립 소식에 당시 경기일보는 음악에 홍난파, 미술에 나혜석, 그리고 문학에 홍사용을 수원의 3대 예술인으로 명명했다. 이 지역(동탄면 석우리)이 당시엔 수원군이었으니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이후 화성시가 동탄신도시를 조성하면서 2010년에 현재 위치에 '노작 홍사용 문학관'을 건립했다. 노작 홍사용은 용인에서 태어나고, 서울로 갔다가 화성군 동탄면으로 내려와 한학을 공부했다. 기자는 1994년 10월에 수원문인협회에 가입했다. 그때 선배 문인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홍사용 시비를 건립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리고 동탄에 노작 문학관 건립 소식에 수원시가 선수를 놓친 셈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문학관이 세워진 것에 기대감도 나타냈다. 이런 이야기를 동행한 친구들에게 들려주니 "수원 문인들이 큰일을 했다. 왜 이런 미담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까. 여기에 그런 기록도 없는 것이 아쉽다."라고 말했다. 홍사용의 휘문의숙 재학 시절 사진. 묘역을 나와 문학관에 갔다. 노작은 용인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 출생으로 나온다. 아버지(홍철유)가 무관학교 1기생으로 합격하자 서울 재동으로 이사한다. 군대 해산으로 아버지와 함께 본적지(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로 내려와 한학을 공부했다. 1916년 다시 서울로 가 휘문의숙에 입학하고 박종화와 만난다. 3·1운동에 가담해 3개월 옥고를 치른다. 노작은 1922년 순문학 동인지 '백조'의 창간 동인으로 이상화·박영희·박종화·나도향·현진건 등과 활동한다.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백조에 발표한 작품이다. 1923년에는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다.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과 산유화회를 결성하고,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과 신흥 극단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39년 "김옥균전"을 집필하다 일제가 검열에 나서자 붓을 꺾어버렸다. 이를 전후해 출가해 전국 사찰들을 순례하며 방랑 생활을 했으나 다시 돌아와 서울 자하문 밖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7년 폐 질환으로 47세의 생애를 마쳤다. 노작의 작품이 수록된 책. 1층 입구에는 백조 창간호를 복원한 책이 있다. 편집인은 홍사용이었지만,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고 발행인은 외국인을 택했다. 1층에는 산유화극장이 있다. 시 낭송회와 각종 세미나는 물론 소규모 연극공연도 한다. 문학관은 전시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주민과 소통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산유화극장은 그런 역할을 한다. 1층 전시실은 주로 노작 홍사용 연보를 보는 곳이다. 2층 기억의 방에 홍사용 관련 글. 일제강점기에 친일의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는 평이 보인다. 2층 전시관은 근대극 운동을 펼친 극단 '토월회'의 이야기를 담은 방과 문예지 '백조'의 이야기를 담은 방, 추모의 방, 기억의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방에서는 홍사용의 문학 활동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특히 '백조'를 담은 방에서는 '백조'에 실린 작품에는 3·1운동 실패에 대한 절망과 애수가 반영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나라를 찾겠다는 염원이 꺾기면서 많은 이들이 좌절했을 것이다. 백조는 그들의 아픔, 슬픔과 함께하고자 했던 잡지다. 기억의 방에는 청마 유치환과 시인 조지훈이 남긴 추모시가 눈길을 끈다. 홍사용은 어린 시절은 부유하게 지냈지만, 말년은 어렵게 살았다. 홍사용은 말년에 어렵게 살다가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비운의 일생이었지만. 누구 하나 기억하지 않았다. 다행히 수원 문인들이 그를 기렸다. 잡초만 무성한 무덤 옆에 시비를 세웠다. 고향의 선배 문인이기 때문에 따뜻한 마음을 십시일반 모았다. 시비 건립은 사람들에게 잊힌 노작 홍사용을 세상으로 불러왔다. 1920년대 시문학사의 역사적 평가를 시작하게 했다. 이게 마중물이 되어 문학관 건립이 이뤄졌다. 지역 주민들은 한국 문단사의 거장을 배출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문학관에서는 후학들이 문학적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소통을 한다. 주민들은 다양한 문예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다. 지역 사랑방이고 문화 공간으로 성장했다. 이게 모두 수원 문인들의 홍사용 시비 건립이라는 출발에서 시작된 것이다. 홍사용, 문학관, 시비, 수원문인협회, 홍사용시비, 백조, 윤재열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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