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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 안과 밖의 홍예 크기가 왜 다를까
화성연구회 수원화성 모니터링
2024-09-09 18:25:54최종 업데이트 : 2024-09-09 18:25:51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장안문 홍예와 천장의 용그림

수원화성 장안문 홍예와 천장의 용그림


(사)화성연구회 7월과 8월 모니터링 활동은 여름철 무더위로 인해 수원광교박물관, 수원박물관에서 수원의 역사와 수원화성의 옛 사진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수원광교박물관에서는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는데 초석을 다진 사운 이종학 선생의 업적을 살펴봤고, 수원박물관에서는 화성전도 12폭 병풍을 통해 200여 년 전의 수원 신도시 모습과 현재 모습을 살펴봤다. 그림을 통해 수원화성 축성 이후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9월이 되면서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지만, 한낮에는 여름 날씨 그대로 늦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9월 모니터링은 수원화성 장안문에서 화서문까지 실시했다. 장안문 홍예의 하부 석재인 선단석, 홍예석, 용을 그린 천장 등 홍예의 구조를 살펴봤다. 한 회원이 "안쪽 홍예와 바깥쪽 홍예의 크기가 다른 것 같은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천장의 용 그림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었는지요?" 라고 질문을 했다.

수원화성 북서포루

수원화성 북서포루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안쪽 홍예의 높이는 19척, 너비는 18척 2촌이고, 바깥쪽 홍예의 높이는 17척 5촌, 너비는 16척 2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 실측을 해봤는데 오차가 거의 없었습니다. 바깥쪽 홍예의 높이가 1척 5촌(영조척으로 1척은 약 31cm) 낮은 것은 바깥쪽 홍예에 대문을 달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안쪽 홍예 위 천장의 가로선을 따라 바깥쪽 홍예 위 천장을 보면 왜 낮게 했는지 구조적인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4 대문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무늬를 그렸다고 기록했습니다.

장안문이 세워질 당시에는 용을 그리지 않았던 것이며 그 이후에도 용을 그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었던 장안문을 1970년대에 복원할 당시의 공사 관계자 말에 의하면, 당시 팔달문 홍예 천장에 용 그림이 있어 장안문에도 용 그림을 그렸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장안문 옹성 모습이 보이는 동영상이 있는데 천장에는 아무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팔달문 홍예 천장의 용 그림도 언제 그렸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라고 모니터링 위원장이 해설을 했다.

장안공원에 있는 화성기적비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안공원에 있는 화성기적비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안문 누각에 앉아 장안문, 북서적대, 북서포루, 북포루, 서북공심돈, 화서문 등에 대해 구조적인 모습과 활용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나누었다. 한 수원화성 해설사 회원은 "수원화성을 해설하다 보면 북서적대에 홍이포가 있는 것을 궁금해하는 관람객들이 많이 있는데 근거가 있는 것인지요. 장안문 공사 책임자 실명을 새긴 돌의 위치가 왜 문밖 오른쪽에 있는지요?"

수원화성 성벽과 북서포루

수원화성 성벽과 북서포루


화성성역의궤, 한글 정리의궤, 일성록, 화성지 등의 기록에 없는 것은 추정만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장안문의 문루 전체와 하부 구조인 육축도 일부 무너졌는데 그때 공사 실명판이 없어진 것 같다. 화성성역의궤에 공사 책임자 실명을 확인할 수 있어 바닥에 복원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4 대문 실명판 위치를 봤을 때 창룡문과 화서문은 문밖 오른쪽에 있고, 팔달문에는 문밖 왼쪽에 있기 때문에 장안문의 경우에도 문밖 왼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화성 화서문 창방의 글씨

수원화성 화서문 창방의 글씨


수원화성은 청나라와 전쟁을 치른 이후에 건설되었다. 특히 격전을 치른 남한산성에서 구조적인 장단점을 반영한 것을 수원화성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홍이포를 남한산성 밖 망월봉에서 남한산성으로 쏘아대자 성벽과 행궁이 무너졌고 인조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쟁 이후에 남한산성에는 옹성이라는 시설을 만들어 대비했고 이 옹성이 수원화성에서 용도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병자호란 후에 조선에서도 홍이포를 가지게 되었는데 수원화성을 복원하면서 근거는 없지만, 북서적대에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원화성 화서문 옆 성벽의 글씨

수원화성 화서문 옆 성벽의 글씨


장안문에서 북서포루 사이 일부 성벽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다. 고구려 성벽의 유전자가 들어가 있어 대단히 튼튼하게 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원화성을 축성할 당시의 관료들은 고구려 성제에 대해 잘 몰랐던 것으로 보이지만 축성 기술자들은 자연스럽게 몸에 녹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성벽에서 돌출시킨 내부에서 대포로 적을 공격하도록 한 군사 시설물로 공격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북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동포루 등 5개가 있다. 5개의 포루는 모두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인데 모두 원형과 다르게 복원해 아쉬움을 준다. 화성성역의궤, 한글 정리의궤 기록, 축성 이후 무너지기 이전의 사진 모습 등을 비교 분석해보면, 무너진 후에도 남아있던 포루 바깥쪽 지대 위의 대포 혈석만 원형 그대로이고, 총혈, 총안, 전안의 숫자와 위치는 제멋대로 복원했다. 그나마 남포루만이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원화성 장안문을 배경으로 모니터링 회원들

수원화성 장안문을 배경으로 모니터링 회원들


서북공심돈은 벽체에 균열이 생겼고 점차 심해지고 있다. 관계기관에서도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데 조만간 보수가 필요해 보인다. 화서문에서 팔달산 방향 성벽과 화서문 창방에 글씨를 쓴 흔적이 있는데 수원화성 복원 전의 글씨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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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장안문, 화성연구회 모니터링,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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