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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쓴 화성행궁 현판이 왜 땅바닥에 있나요?
화성연구회 화성행궁 모니터링
2024-10-10 13:17:42최종 업데이트 : 2024-10-10 13:17:39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지난 8일 오후 2시,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에는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었다. 단체로 관람을 하러 온 학생들, 서울의 어느 시장 상인회 대표들, 가족, 연인 및 외국인 등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가을 햇살이 약간은 덥게 느껴지는 오후였지만 화성행궁을 둘러보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화성연구회 10월 모니터링 활동을 위해 회원들이 화성행궁에 모였다. 화성행궁 입구 왼쪽 바닥에 있는 '화성행궁' 현판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1790년 화성행궁을 처음 지었을 때 현재의 봉수당은 장남헌이라 명명하고 정조대왕이 직접 쓴 현판을 걸었습니다. 1793년 1월 수원을 방문한 정조대왕은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꾸고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화성행궁 현판 글씨를 직접 썼습니다. 1795년 윤 2월 수원 행행 당시 혜경궁홍씨 회갑연 때 장남헌을 봉수당으로 바꾸고 조윤형의 글씨로 현판을 걸었습니다."라고 김남옥 화성연구회 회원이면서 국가유산 해설사가 현판의 내력을 설명했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옆에 있는 화성행궁 현판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옆에 있는 화성행궁 현판


일반적으로 현판을 교체하면, 교체된 현판을 건물 안에 걸어둔다. 1795년 당시 봉수당에는 봉수당 현판이 걸려있고 봉수당 안 마루 위에 장남헌, 화성행궁 현판이 걸려있었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화성행궁이 파괴된 것을 2002년 1차로 복원하면서 화성행궁 밖 땅바닥에서 화성행궁 현판이 간판 노릇을 하고 있다. 무엄하게도 어이없는 일이다. 정조대왕의 어필 현판인 만큼 신풍루 내부나 봉수당 내부에 거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화성행궁(華城行宮) 현판 글씨는 해서체로 썼고 오른쪽 화(華)자 옆에는 어필(御筆)과 홍재(弘齋)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어필은 왕의 글씨, 홍재는 정조대왕의 호다. 왼쪽 궁(宮)자 옆에는 전서체로 '여천위십유팔년계축맹춘(予踐位十有八年癸丑孟春)'이라 썼다. '내가 왕위에 오른 지 18년 되는 해인 계축년(1793) 1월'에 썼다는 뜻이다. 글씨 아래에는 정조대왕의 어보인 규장지보(奎章之寶)가 새겨져 있다. 화성행궁 현판의 크기는 105.9 x 319.7cm이며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화성행궁 정전인 봉수당, 조윤형이 썼다.

화성행궁 정전인 봉수당, 조윤형이 썼다.


화성행궁 정전인 봉수당 앞에서 1789년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 읍치 자리로 천장하고 읍치를 팔달산 아래인 현 위치로 옮기면서 수원 신도시와 관청이 건립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정조대왕은 1789년부터 1800년까지 13번 수원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봉수당 현판의 크기는 가로 90cm, 세로 218.3cm인데 처마 밑으로 약 30cm 정도 내려와 있어 안으로 들어갈 때 머리가 닿는다. 원래 현판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이것은 봉수당을 복원하면서 건물의 높이가 낮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50cm 이상 높아야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원화성은 화성성역의궤에 설계도가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지만 봉수당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이런 모습으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행궁 정전인 봉수당, 지붕의 기와가 밖으로 미끄러져 나와 떨어질 것 같다.

화성행궁 정전인 봉수당, 지붕의 기와가 밖으로 미끄러져 나와 떨어질 것 같다.

화성행궁 정전인 봉수당, 월대의 수평이 맞지 않고 경계석이 밖으로 밀려나 붕괴 위험이 있다.

화성행궁 정전인 봉수당, 월대의 수평이 맞지 않고 경계석이 밖으로 밀려나 붕괴 위험이 있다.


봉수당 앞 월대는 수평이 맞지 않았고 경계석이 밖으로 밀려 나왔다. 안전사고 위험이 있어 보인다. 또한, 지붕의 기와도 밖으로 밀려 나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월대와 지붕에 대한 안전진단이 필요해 보이며 즉시 수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낙남헌 월대와 화령전 월대도 수평이 맞지 않아 수리가 필요해 보인다.
 
낙남헌과 우화관 사이에 새로 복원한 연못과 취병

낙남헌과 우화관 사이에 새로 복원한 연못과 취병


새로 복원한 우화관 영역으로 들어가 낙남헌 동행각 마루에 앉아 우화관에 관한 복원과정을 들었다. 우화관 영역뿐 아니라, 연못과 취병도 복원했다. 

한 회원은 "우화관 내부에 전시된 전시물의 관람 방향이 반대로 된 것 같습니다. 내부로 들어갈 때는 왼쪽이 입구인데 이곳 전시물은 오른쪽부터 되어 있습니다. 우화관에 전패가 없는 것은 복원의 완결성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화관의 정체성으로 봤을 때 당연히 전패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올바른 지적인 것 같다.

우화관

우화관


화령전을 들러 간단히 참배하고 봉수당 뒷벽에 있는 수원 행행 8폭 병풍과 반차도 등을 살펴봤다. 햇빛으로 인해 색이 많이 바랬다. 1795년 수원행차 당시 그린 '화성행행도 8폭 병풍'은 원본처럼 컬러로 프린트해 교체했으면 좋겠다. 보기에도 좋지만 그림을 읽고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별주를 복원한 영역에서 별주를 둘러봤다. 별주 밖 행궁 쪽 바닥은 수평이 맞지 않아 비가 오면 물이 10cm 이상 고인다. 복원 당시부터 그랬는데 세심한 마무리가 아쉬워 보인다. 수평을 맞춰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낙남헌과 우화관 경계에 있는 낙남헌 동행각

낙남헌과 우화관 경계에 있는 낙남헌 동행각


별주 밖 연못은 정사각형이 아니고 부정형으로 복원했다. 발굴조사 결과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연못 중 이런 형태는 여기가 유일하다. 화성전도 등 여러 그림에는 정방형으로 나와 있고 조선의 정원과 연못 양식도 당연히 천원지방 원칙을 지켰는데 유구가 나오지 않았다고 이렇게 복원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별주 연못' 설명문에는 19세기에 그려진 '화성전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설명문에 인용한 그림은 19세기 그림이 아닌 18세기 그림으로 추정되는 6폭 병풍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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