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국립농업박물관, 우리나라의 연대별 식(食)문화 전시회 개최
세계각국의 음식을 다양하게 즐기는 식문화
2024-12-30 13:47:36최종 업데이트 : 2024-12-30 13:47:35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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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연대별 식문화 전시가 열리고있는 교육동 전경
어린이도 아빠와함께 신석기시대 유물을 살펴보는 모습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주식인 밥과 부식인 반찬으로 이뤄진 한상차림 식문화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문화는 주식인 밥의 부족한 영양을 반찬에서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밥은 주로 쌀이나 보리 등의 곡식을 쪄서 만들었으며 반찬은 채소, 육류, 어류 등 다양한 영양소를 지닌 재료를 사용하였다. 밥한상 차리는 다양한 음식재료
우선, 약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에는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동굴에서 살거나 강가에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용풀이나 열매를 채집하여 먹고 살았다. 커다란 돌을 깨서 만든 주먹도끼, 여러 면석기, 주먹찌르개 등 돌을 뗀석기를 사용하여 짐승과 물고기를 잡았다. 주먹도끼는 주먹에 움켜쥐고 열매를 채집하거나 동물의 뼈를 도려낼 때 도끼처럼 찍고 자르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음식은 불을 사용하여 익혀 먹었다. 구석기시대의 돌을 뗀 주먹석기류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시기로 밭농사에 사용할 물을 끌어들이기 쉬운 강가나 바닷가 근처에 정착하여 살았다. 밭에서 콩이나 조, 팥, 피, 수수 등을 심고 개와 돼지를 키웠으며 물고기와 조개를 수렵 채취하는 어로생활을 통해 식생활을 유지하였다. 돌과 갈판 등 석기를 이용하여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다양한 크기의 빗살무늬 토기와 음식 조리와 식량 저장 등에 사용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유물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는 갈판과 갈돌 빗살무늬 토기, 두귀달린 토기 등 신석기 토기류신석기시대의 유물을 살펴보는 관람객
청동기시대에는 강가나 계곡 근처의 구릉지나 산기슭에 소규모로 모여 살았다. 집안에 화덕을 설치하여 난방에 활용하거나 음식을 익혀먹었다. 정착지 주변에 논과 밭 등의 경작지를 만들어 식량을 조달하였다. 탄화된 쌀과 볍씨 자국이 있는 토기 등을 통해 벼농사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조리 도구로 시루를 사용했다. 청동기시대 나진 초도 패총, 북창군 대평리 유적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시루를 이용해 조리한 음식으로 찐 밥, 찐 떡, 고기류나 어패류의 찜 요리 등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찜요리를 해먹는 청동기시대의 솥과 시루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탄화된 쌀
삼국시대 식재료를 확보하는 방법도 알 수 있었다. 전시회 설명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는 주로 밭농사와 논농사를 이용하였고 고구려는 주로 밭농사를 중심으로 식재료를 확보하였다. 주식으로는 밥이 자리잡았는데 철제솟이 보급된 것이 가장 큰 영양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및 통일신라시대의 밥솥
고려 초기에는 국교인 불교의 영양으로 살생을 막기 위해 가축의 도축이나 어로활동 등 살생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육류나 생선을 대신할 채식 위주의 식생활이 발달하였다. 초를 만들어 요리에 사용하였으며 참깨를 재배하여 참기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채소 음식의 발달로 국물까지 먹는 김치가 발달하여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발효기술이 정착하였다.
불교에서는 차(茶) 문화가 유행하여 차를 즐기는 다도가 생겼고 밀가루와 꿀을 반죽하여 기름으로 지져 만든 유밀과 정과류 등도 발달하였다. 또한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조미료가 유입되어 다채로운 맛을 즐기는 식생활을 영위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가축 도살법과 여러 가지 육류 조리법이 발달하여 고기요리가 성행했다. 그리고 만두의 일종인 상화(霜花)가 들어오고 술을 증류하는 기술이 알려져 증류 식 소주가 등장하였다. 이 외에도 포도주, 사탕, 후추 등이 전해졌으며 고려가 원나라에 전수해 준 음식으로는 유밀과(고려병) 인삼주, 생선국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양반제도가 정착되었고 '경국대전'을 통해 관례, 혼례, 장례, 제례 등의 기본 규범이 확립되었다.'규합총서' '농가집성' 등 조리서와 농서 등이 출판되었고 각 지방에 따라 특색 있는 향토 음식이 발달하였다. 우리 식생활 문화의 전통이 오늘날과 비슷한 식생활문화가 자리 잡았다.
대마도, 일본 등 남쪽에 위치한 나라들로부터 고추,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땅콩 등 외래 작물이 유입되었다. 고추는 고춧가루와 고추장으로 가공되어 김치를 비롯한 각종 음식의 조리에 중요한 향신료로 사용되었다. 비빔밥은 조선전기에는 '혼돈반' 조선후기에는 '골동반' 또는'부븸밥'으로 불렸다. 비빔밥은 쌀밥과 여러 가지의 색의 반찬이 한데 어우러져 한상차림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는 청나라, 러시아 및 일본과의 교류로 서양문화의 유입은 우리 식생활에도 영양을 주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쌀, 보리, 인삼, 해삼 등을 외국으로 수출하고 술, 향료, 조미료 등은 수입하였다. 이에 따라 서양의 문물과 다양한 음식, 조리법 등이 전해지면서 서양음식문화가 조선 사회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토지, 쌀 등 물적 자원을 수탈하면서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되었다. 원래 우리의 전통적인 식문화는 각자 독상이 기본이었으나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한상에 음식을 차리고 여러 명이 둘러앉아 먹는 식사문화로 변화하였다. 반찬도 가공식품인 일본식 왜간장(일본간장)과 아지노모도(조미료)의 등장으로 우리의 식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해방 이후에도 전쟁과 흉년으로 인하여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생계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쌀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혼분식(잡곡밥) 장려운동과 미국에서 식량원조로 들어온 밀가루의 유통으로 밀가루 음식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60~70년대에는 우리 군이 월남전에 참전함으로서 미국으로부터 우리 군 현대화와 480 양곡(미 잉여농산물) 밀과 밀가루 원조를 받아 농가마다 밀가루가 넘쳐나 팔아서 가용돈을 쓰기도하고 수제비, 국수, 빵 등으로 보릿고개를 면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식생활도 영양과 맛을 추구하는 풍요로운 식생활로 변화하였다.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식생활에서 다양한 음식과 부식을 함께 하는 변화가 일어났으며 가공식품과 커피 등 기호식품의 이용이 증가하였다.
우리나라의 음료는 누룽지를 끓인 검붉은 커피색의 구스름 한 숭늉이었다. 70년대 전기밥솥이 등장하면서 숭늉대신 보리를 태워 끓인 보리차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암거래로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전국 시골에까지 다방(茶房)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커피의 대중화를 이루었다.
19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식품의 소비 형태가 세계화되면서 동서양 세계 각국의 음식을 다양하게 즐기는 식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바쁜 현대 생활로 인해 음식을 직접 요리해 먹는 것보다 가공식품이나 편의식품 등을 이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수원에서 왔다는 박 모 씨(36)를 만나 관람한 소감을 물어봤다. 그는 "선조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전시를 보고나서 선조들의 원시적인 삶과 식문화를 보니 우리는 문명이 발달한 문화 속의 주거와 식문화로 너무나 좋은 시대에 태어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라고 한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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