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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박물관, 화성 축성과 화성 문화 전시회 열어
역사의 도시, 문화의 도시, 관광의 도시... "수원은 정조의 유산"
2025-02-24 17:47:43최종 업데이트 : 2025-02-24 17:47:41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관람객들이 화성축성 과정을 살펴보는 모습

관람객들이 화성축성 과정을 살펴보는 모습

 


수원에 살면서도 수원에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수원의 역사를 알려면 정조 시대를 살펴봐야 한다. 지난 20일 취재차 수원화성박물관을 방문했다. 수원화성박물관 1층은 주로 정조시대의 유물이나 기록, 사진같은 기획전시실이고, 2층은 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로 조성되어 화성축성 관련 149점과 화성문화 관련 66점을 비롯한 야외 25점의 유물과 기록물, 영상물, 사진 등을 상시전시하고 있다. 평일인데도 관람실에는 어린 학생들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관람객들이 끊임없이 줄을 잇고 있다.


화성축성실

조선시대는 반상제가 엄연한 양반들의 나라였다. 모든 권력이 군주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나 왕 혼자서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양반 관료들에게 일정 부분 권력을 나누어주고 국정을 위임하는 양반 관료사회였다. 그러다보니 당쟁이 끊이질 않고 때로는 왕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당쟁으로 희생된 사도세자에 이어 정조도 어렵게 보위에 올랐다. 하지만 정조에게는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세상을 뜨기 전 (1798년,정조 22)까지 정조의 곁을 굳건하게 지키며 정조를 도운 충신이 있었기에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조가 꿋꿋하게 개혁정치를 펼 수 있었다.
 

채제공 72세때 흑단령포 본 전신영상

정조의 충신 채제공 72세때의 초상화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조선후기 문예 군주이자 개혁군주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고 장용영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탕평책을 추진하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정조는 조선시대 세종임금과 더불어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정조임금은 수원화성축성과 신도시 수원 건설을 통하여 오늘의 수원을 탄생시켰다. 


수원화성의 축성계획

1790년 부사직(副司直) 강유(姜遊1722~?)는 사도세자가 묻힌 곳, 화성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수원에 성곽을 쌓을 것을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정조는 신도시 수원의 건설로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성곽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게 하기 위한 축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서학을 익힌 규장각 소속 정약용에게 축성계획을 지시하였다. 정약용은 정조의 의중을 꿰뚫고 선진국 중국과 일본의 축성제도는 물론 중국을 통해 입수한 서양의 과학 기술 서적을 연구하여 1792년 성(城)을 쌓기 위한 이론과 기술을 정리한 보고서 성설(城說)을 정조에게 올렸다. 정조가 직접 축성의 기본 방향을 밝힌 '어제 성화주략(御製城華鑄略)' 에는 정약용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1796년 완성된 수원화성 도면

1796년 완성된 수원화성 

 

조선시대 건축보고서의 진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수원화성 축성은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판단으로 정조는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鐘秀)에게 편찬을 명령 1796년 완공된 수원화성의 축성에 관한 기록을 집대성한 책이다.
 

수원화성 축조의 기록을 집대성한 화성성역의궤

수원화성 축성의 기록을 집대성한 화성성역의궤

 


1801년에 간행된 종합보고서로 건축 도면과 축성기계의 그림도 수록하여 당시의 건축기술과 과학 수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성곽 시설물의 도면뿐만 아니라 축성도구 재료의 쓰임과 비용, 중앙관리로부터 공사 인부에 이르기까지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임금지불에 대한 모든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이로인해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성행행도(華城幸行圖)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행해진 수원행차의 중요행사를 묘사한 8폭의 그림이다. 19세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8폭의 배열 순서는 행사 일정에 따라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방방도, 서장대야조도, 봉수당진찬도, 낙남헌양로연도, 득중정어사도, 환어행열도, 한강주교환어도로 하였다.


정조의 수원행차를 묘사한 8폭의 그림이다

정조의 수원행차를 묘사한 8폭의 그림


정조는 을묘년 화성원행때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을 방문하여 행궁 봉수당에서 백성들을 초청, 회갑연(진찬연)을 베풀어 정조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백성들에 대한 애민정신(愛民精神)을 엿볼 수 있다. 수원시는 정조의 을묘년 화성원행에 따른 정조임금의 능행행차를 비롯해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장용영의 무예, 과거시험, 야조 등의 문화행사를 매년 시행하고있다.


을묘년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모습

을묘년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모습


농업정책과 만석거와 둔전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면서 화성일대에 만석거를 비롯한 동서남북에 인공 저수지를 만들고 국영 농장인 둔 전을 만들어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농지가 없는 백성들에게는 둔전을 경작케하여 삶에 안정을 추구하게 하였다. 


수원화성의 북쪽에 만들어진 인공 저수지 만석거 남쪽에 수문을 설치하고 둔전인 대유 평야에 이르기까지 배수로를 만들어 농사철이나 가뭄에는 만석거에 모인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게하였다. 수문을 열면 배수로를 따라 흘러온 물은 수차(일명 물자세)를 이용해 논으로 물을 퍼올려 모내기를 했다.

저수지와 수차를 이용한 농법 개발과 이양법의 실시로 생산량을 크게 향상해 수원을 농업의 신도시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연유로 수원은 수원 고등농림학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권업모범장, 농촌진흥청 등이 설립되어 식량 증산 정책과 농업개혁 연구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날 국립농업박물관도 수원에 자리잡게 되었다.

 

관개수 물을 수차로 논에 물을대 모내기를 하는 모습

배수로 물을 수차로 논에 퍼올려 모내기를 하는 모습


상업정책과 상업중심지, 수원

조선 시대에는 반상제가 엄연해 상인들을 천대시 하였으나 정조 시대에는 장사와 유통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상업정책이 변화하는 시기였다. 정조는 상업을 발전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했다.


정조는 교통의 중심지인 수원 신도시에 한양과 유사한 시 전을 설치하여 상업 중심지로 성장시키고 새로운 상업정책을 펼치고자 했다. 시전은 상전(소금 및 일용잡화) 포목 전(베나 무명 옷감) 입색전(비단), 어물전(생선), 유철전(놋쇠로 만든 물건) 주막(술과 음식) 등을 비롯해 소전(우시장)과 나무전(땔감)이 있었다.


국방정책과 서북공심돈 (西北空心墩)
정조는 팔달산을 중심으로 성곽을 쌓고 적의 공격에 대비해 공심돈을 설치하고 장용영 군사를 육성해 훈련을 강화했다.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 밖에 있는 시설물로 적을 공격하는데 용이하게 설계되었다.

내부는 3층으로 2층과 3층에 마루를 깔고 사다리를 놓아 오르내리게 했다. 내부의 작은 구멍은 백지총, 큰 구멍은 불링기포를 쏠 수 있는 총구며 장수는 맨 위 누각에서 지휘하였다. 서북공심돈은 축성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보물 제710호로 지정되었다.
 

공심돈의 내부 단면도, 장수가 맨 위 3층에서 지휘하는 모습

서북공심돈의 내부 단면도, 맨 위 누각에서 지휘하는 장수의 모습


120 여년 전 수원화성일대의 사진전시

120 여년 전 주일(駐日) 독일대사관 무관인 독일군장교 헤르만센더(Hermann Sander,1868~1945)씨는 조선에서 1년간 근무한바있다.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자 기차를 타고 일본인 사진사와 함께 조선과 중국여행을 다녔다. 1907년 3월 헤르만센더씨는 수원을 방문하였다. 이때 수원화성일대를 촬영한 15컷의 귀중한 사진이 전시되었다
 

100년 전 남 공심돈 일대의 모습

1907년 헤르만센더씨가 촬영한 남 공심돈일대의 모습(국립민속박물관 소장)100년 전 화홍문의 모습

1907년 헤르만센더씨가 촬영한 화홍문의 모습(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취재 중 두 자녀들과 함께 관람 온 가족과 인터뷰를 했다. "수원에 살면서도 수원에 관련해 별 관심 없이 살았는데 박물관에 와서 전시된 유물과 사진, 기록물 등을 살펴보니 수원은 정조임금이 만든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며, "방학 중이라 아이들과 함께 오기를 잘 했다."라고 말했다.


엄마와 함께온 아이들이 전시된 기록을 살펴보고있는 모습

 아이들이 화성축성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


수원은 정조의 유산이다. 220여 년 전 정조는 당쟁으로 할아버지 영조의 버림을 받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땅 배봉산에서 화성 화산리로 이장하고 수원 팔달산 아래에 행궁과 화성을 축성하고 농(農), 상(商), 공(工) 신도시를 개발, 화성백성들을 이주케 한 것이 오늘에 역사의 도시, 문화의 도시, 관광의 도시 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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