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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행궁과 사근행궁'을 아시나요?
수원 화성행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2025-03-20 11:16:13최종 업데이트 : 2025-03-20 11:16:12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1795년 정조대왕능행차를 그린 '화성행행 8폭병풍' 중 환어행렬도, 시흥행궁 부분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795년 정조대왕능행차를 그린 '화성행행 8폭병풍' 중 환어행렬도, 시흥행궁 부분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지난 15일 오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사)화성연구회 주관으로 '시흥행궁과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가 열렸다. 이날 강의를 맡은 화성연구회 부이사장 김관수 박사는 '여유당건축'을 운영하며 국내 고건축을 깊이 연구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전문가다.
 

1795년 2월 9일부터 16일(양력 3월 29일부터 4월 5일)까지 8일간의 정조대왕 수원행차에서 시흥행궁은 많은 인원이 오가며 숙박한 곳이었고, 사근행궁은 잠시 쉬며 식사를 했던 곳이었다. 화성행궁과 함께, 이곳들은 정조대왕 능행차길의 중요한 문화유산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이곳 행궁들은 현재는 사라졌지만,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행행 8폭병풍'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들이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시흥행궁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시흥행궁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


김관수 박사는 당대의 역사적 기록과 지도 등을 고증해 시흥행궁과 사근행궁의 원래 위치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고,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보여주었다.
 

화성행궁은 1789년에 건립되어 정조대왕이 수원에 행차할 때마다 머물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문화적 열등감으로 인한 우리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병원, 관공서, 학교 등으로 사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화성행궁은 1989년 당시 수원문화원장이었던 심재덕 전 수원시장과,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바로잡는 데 헌신한 역사학자 이종학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수원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복원 사업을 시작했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시흥행궁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 시흥행궁의 위치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시흥행궁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 시흥행궁의 위치


2002년, 화성행궁의 신풍루, 봉수당, 복내당, 유여택, 남군영, 북군영, 장락당, 미로한정 등 482칸이 복원되었고, 2024년에는 우화관과 별주 등도 복원돼 옛 화성행궁 대부분이 복원됐다. 화성행궁의 복원은 수원 시민의 자긍심이자 정체성을 정립하는 의미를 지닌다.
 

수원에서 화성행궁 복원의 역사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오랜 시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이 일이 시흥행궁과 사근행궁을 보존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자체의 문화유산 보호 단체와 언계해 지자체와 주민, 건설사를 설득해 현재의 경제적 가치를 넘어, 문화유산이 보존되고 복원될 때의 역사적 가치와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후손들에게 알려야 한다.

 

김관수 박사는 "궁궐에는 누가 살았습니까?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궁궐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화성행궁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사람이 살지 않는 건축물은 살아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문화유산 복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시흥행궁과 사근행궁은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라고 강조했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시흥행궁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 사근행궁의 위치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시흥행궁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 사근행궁의 위치


시흥행궁은 1795년 윤2월, 정조대왕이 혜경궁홍씨와 함께 수원행차를 하기 전에 1794년 2월에 건립됐다. 이전의 행차로였던 남태령을 넘는 길은 가마가 지나가기에 너무 험난했기 때문에 평평한 시흥대로를 새로 건설하고, 그 중간에 잠시 쉴 수 있는 시흥행궁을 지은 것이다. 시흥행궁의 모습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화성행행 8폭병풍' 중 '환어행렬도'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시흥행궁도 화성행궁처럼 일제강점기에 학교, 군청, 병원 등으로 사용되면서 훼철되었다.
 

사근행궁은 지지대고개를 넘어가 오른쪽에 '사근행궁터'라는 비석만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아파트 공사를 위해 펜스에 갇힌 채로 방치되고 있다. 원래는 '사근(沙斤)'이었다가, 정조대왕이 '사근(肆覲)'으로 바꿨다. 바꾼 이유는 '4서 3경' 중 하나인 서경(書經) 우서 순전(虞書 舜典) 8장 1절의 '동순망질 사근동후(東巡望秩 肆覲東后)'라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며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동쪽의 임금에게 예를 표했다는 의미인데, '사근'이란 말은 임금(사도세자)에게 예를 표하러 가는 길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정조대왕이 서경을 인용해 '사근(肆覲)'으로 바꾼 것은 매우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정조대왕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도 '사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시흥행궁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 소멸 위기에 처한 사근행궁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시흥행궁 사근행궁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 소멸 위기에 처한 사근행궁
 

'동순망질 사근동후'라는 말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고대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설문해자에는 '근(覲)'자를 '제후가 가을 아침에 천자를 알현하는 경우를 '뵐 근'이라 하고, 임금을 섬기는 일에 애쓴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이를 해석하면 '순임금이 동방의 천자였던 고조선의 단군왕검을 알현했다'는 의미로,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김관수 박사는 "현재 정조대왕 능행길에 있던 시흥행궁, 사근행궁, 화성행궁 중 화성행궁만 제대로 복원되었고, 시흥행궁과 사근행궁은 무관심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앞으로 '정조대왕 능행차'가 무형유산이 되려면 왕의 행차가 머물렀던 행궁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보존 및 복원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며 강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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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시흥행궁, 사근행궁, 화성연구회,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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