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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만난 우리 동네 옛 모습
호매실지구 개발 과정에서 나온 유물을 만나고
2025-04-07 14:36:24최종 업데이트 : 2025-04-07 11:37:15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야외 전시장에 금곡동 출토 고인돌.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돌무덤이다.

야외 전시장에 금곡동 출토 고인돌.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돌무덤이다.


  박물관에 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유물을 보면서 다시 역사를 만난다.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찾는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방문하는 때도 많다.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에서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보니 박물관을 찾는 것이 정해진 것은 없다. 찾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특별한 목적 없이 자주 찾는 습관대로 수원박물관에 갔다. 미세먼지가 많다고 해서 실내로 찾아간 것이다. 늘 오던 곳이라 특별한 것이 없다. '항거, 수원 1919' 특별전시회도 봤다. 그런데 2층 역사박물관을 돌다 보니 호매실, 금곡동 유물이 보인다. 수원 지역 중에서도 우리 동네다. 택지 개발 당시 나온 청동기 시대 유물이다. 그야말로 역사 시간에 교과서로만 배운 시대다. 선사시대는 까마득한 시간이라 느낌도 없다. 그런데 우리 동네 유물이라고 하니 갑자기 새롭게 다가온다.  
호매실지구 택지개발사업 중에 나온 유물이다. 청동기 시대 토기다.

호매실지구 택지개발사업 중에 나온 유물이다. 청동기 시대 토기다.


  골아가리 토기와 구멍무늬 토기는 호매실지구 택지개발사업 중에 발굴 조사에서 나온 유물이다. 청동기 시대 유물로 붉은 흙으로 빚었는데,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다. 깨진 자국 이외는 형태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긴 시간 동안 땅속에서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토기로 음식을 익혀 먹거나 보관했을 것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남긴 유물이 앞에 있다.
  야외 전시장에도 청동기 유물이 있다. 금곡동 고인돌이다.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2,000년경~기원전 300년경이라고 한다. 전 세계 6만기 중 4만기가 한반도 지역에 분포한다. 이 돌은 수원 칠보산 자락에 있었다. 잘 다듬은 굄돌(지석- 支石)을 세워 무덤방(묘실- 墓室)을 만들고 큰 덮개돌(상석- 上石)을 얹은 탁자식 고인돌이다. 여기산 선서유적과 더불어 수원의 유구한 역사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2009년 금곡동 택지 개발로 수원박물관에 이전되었다.
금곡동에 청동기 시대 움집터. 금곡동 옛 중촌마을이 있던 언덕의 것을 복원한 모형이 있다.

금곡동에 청동기 시대 움집터. 금곡동 옛 중촌마을이 있던 언덕의 것을 복원한 모형이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금곡동 청동기 시대(기원전 1,000년 경) 움집터도 있다. 움집은 땅을 파서 움을 만든 후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 만든 주거지다. 금곡동 옛 중촌마을이 있던 언덕에 있던 것을 복원한 모형이다. 움집터 주변으로 동일시기의 움집 20여 기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사용하던 생활 용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생활용품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불에 탄 것은 당시 움집터에 전염병이 돌아 일부러 불을 내고 폐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시대 전주류씨 효자 정문. 금곡동에 있던 것을 2008년 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조선 시대 전주류씨 효자 정문. 금곡동에 있던 것을 2008년 박물관으로 이전했다.


  호매실동에는 움집이 모여 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토기를 사용했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돌무덤도 있었다. 이런 유물은 우리 동네가 아주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다. 칠보산은 동네를 안전하게 감싸고 있다. 산에 많은 돌은 생활에 두루 쓰였다. 칠보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은 지금도 금곡천과 호매실천을 만든다. 당시에도 천변에 물은 생명의 형성과 유지 보존을 했다. 산과 천이 있는 동네는 먹을 것도 풍요로웠으니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박물관 야외에는 조선 시대 전주류씨 효자 정문이 있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 타인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의 행적을 알리고자 연고가 있는 마을 입구나 집 대문 앞에 나무로 만들어 세우던 붉은 문이다. 류태명과 증손자 류의의 효자 정려문을 정려각에 상하로 걸어 놓았다. 상촌의 전주류씨 종가인 류원상 씨 집 대문 옆(금곡동)에 있던 것을 2008년 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원본은 보관 중이고 야외에 재현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수원특례시의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시실 유리 안에 깨진 조각을 이어 놓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릇을 본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삽화로 실린 그림과 같다. 유물 앞에 오래 서서 쳐다보니 사람들이 연상된다. 사람들은 당시에 의식주 방식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삶에 몰입하며 생각도 다양하게 했다. 교과서 밖으로 튀어나온 유물이 순식간에 까마득한 시간을 연결한다.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어떡하다가 지금까지 남았다. 그 시간의 위대함 앞에 놀란다. 이것만으로 박물관에 와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호매실동에 효자문은 도시 개발로 사라지고, 대신 다리 이름에 흔적이 남아 있다.

호매실동에 효자문은 도시 개발로 사라지고, 대신 다리 이름에 흔적이 남아 있다.


  호매실 택지 개발로 땅속에 있던 유물이 나왔지만, 반대로 도시변화로 사라진 것도 있다. 호매실동(402-62번지)에 효자문이다. 조선 후기 한의리가 병환 중인 어머님께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봉양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했다. 이런 효성을 알게 된 고종이 효자문을 내렸다. 그런데 도시계획으로 효자문은 2000년에 화성군 향남면 독정리에 문중에서 신축 이전했다. 
  효자문은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아 있다. 호매실동 평안 교회 쪽에 효자문교가 있다. 효자문이 있었던 곳이니 다리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개발과 보존을 지혜롭게 지킨 것이다. 함께 지켜나가야 할 가치를 이렇게 보존한 것이다. 이런 것으로 공동체 의식도 생기고, 우리라는 정체성도 만들어진다. 그 정신이 삶을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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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매실동, 금곡동, 청동기시대, 역사,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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