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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상처를 볼 수 있는 수원화성 사진
수원박물관 상설 전시장에서
2025-05-22 13:37:36최종 업데이트 : 2025-05-22 13:37:34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방화수류정 주변에 피란 민촌. 누각에도 움막이 처져 있고, 아래로는 움막집이 틈도 없이 들어앉았다.

방화수류정 주변에 피란 민촌. 누각에도 움막이 처져 있고, 아래로는 움막집이 틈도 없이 들어앉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5년 되는 해다. 수원시에 따르면 "수원은 한국전쟁 동안 북한·중공군과 남한·유엔군이 4차례나 번갈아 가며 점령과 탈환을 한 치열한 격전지였다."라고 한다('한국전쟁: 기억의 파편' 수원 구 부국원 2023년 2월 24일~6월 30일 전시전, 참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열흘도 안 돼, 수원까지 내어놓고 후퇴하게 된다. 북한군에 밀려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고 혈전을 벌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새벽에 갑작스러운 남침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전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전력 장비도 열세였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북한군도 막을 수 없었다. 
  공중전은 달랐다. 1950년 6월 27일 김포비행장과 수원비행장 상공에서 한국전쟁 최초의 공중전이 있었다. 미국과 북한의 항공기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미 공군이 조선인민군 항공기 9기 중 7기를 격추하며 승리했다. 대한민국이 직접 교전한 첫 항공 전투가 수원 상공에서 있었다.
 
장안문 2층 누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옹성만 남았다.

장안문 2층 누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옹성만 남았다.


  치열한 격전지인 만큼 피해도 컸다. 당시 피해 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사진을 수원박물관 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무너진 수원화성의 모습에서 전쟁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집에 없이 성곽에 기대어 힘겹게 살아가는 시민들 모습도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방화수류정 주변에 피란 민촌 사진이 있다. 동북각루라고 하는데,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군사 시설이지만 연못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정자다. 그래서 방화수류정이라는 별칭을 더 많이 쓴다. 멀리 광교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누각이 전쟁 포탄은 피한 듯하다. 지붕이 온전하고, 기와와 잡상도 훼손된 것이 없다. 
  누각 원형은 잘 남아있지만, 주변은 전쟁 흔적이 역력하다. 누각에도 움막이 처져 있다. 아래로는 움막집이 틈도 없이 들어앉았다. 한국전쟁 발발 후 수원을 비롯해 화성, 안성, 평택 등지에 피란민들이 정착했다. 수원에도 수용소가 설치되고,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판자촌이 형성됐다. 판자촌은 하꼬방이라 불렀는데, 성곽 주변에서 하천까지 확대됐다(ebook 수원시사 12권 수원 이주민의 정착과 정체성, 161쪽). 여기에 움막들이 전쟁에서 밀려온 사람들이다. 앞길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소녀와 여성이 보인다. 엄마와 딸이 가족을 잃고 힘겹게 사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팔달문은 전쟁 포화 속에서도 그대로 남았다.

팔달문은 전쟁 포화 속에서도 그대로 남았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수원에는 "남문은 남아있고, 서문은 서 있는데,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갔네"라는 말이 생겼다. 이는 팔달문과 화서문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고, 장안문과 창룡문은 폭격을 입었다는 뜻이다. 
  창룡문은 아예 문루가 없이, 옹성만 보인다. 문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으로 폭격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돌로 옹성은 그대로 있다. 옹성 위에 어린아이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고, 친구들이 바라보고 있다. 여장이 모두 무너져 있고, 뒤편으로 동포루도 보이지 않는다. 옹성 아래는 집이 있고, 어린아이가 혼자 서 있다. 집 뒤에는 가장인 듯한 사람이 혼자 일하고 있고, 길에는 서둘러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창룡문은 아예 문루가 없이, 옹성만 보인다. 문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으로 폭격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창룡문은 아예 문루가 없이, 옹성만 보인다. 문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으로 폭격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장안문도 참담하다. 장안문은 북문이지만, 서울에서 오면 정문 격이다.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옹성만 남았다. 옹성으로 보이는 성안 쪽 모습을 보면, 폭격으로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
  옹성 머리에는 영어 간판이 있다. 차량이 지나는 높이를 써 놓았다. 미군 헌병으로 보이는 군인이 서 있고, 어린아이들이 걷고 있다. 왼쪽에는 옹성이 만든 그늘에 더위를 피해 많이 사람이 앉아 있다. 오른쪽에는 초가집이 있고, 여인들이 쉬고 있다. 장안문이 송두리째 파괴된 것처럼, 저들도 잃고, 가족과 집을 잃었을 수도 있다. 고향을 떠나 피란지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파괴된 장안문 사진 한 장이 많은 현실을 담고 있다. 수원 지역 사람들을 넘어,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 
  팔달문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그대로 남았다. 누각의 기와가 들뜨고, 성벽에 풀이 자랐다. 이는 세월의 흔적이고 관리를 소홀히 한 모습이다. 팔달문은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안 모습이다. 왼쪽 오른쪽을 보면 작은 집 같은 것이 보이는데, 문루까지 주거 공간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성곽 주변 풍경 사진. 문루의 웅장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성곽 주변 풍경 사진. 문루의 웅장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시설물인 팔달문, 화서문, 서북공심돈, 방화수류정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버텨온 옛 수원화성 사진은 수원박물관 유물 자료실(https://smuseum.suwon.go.kr/sw/main/view) 에서 더 볼 수 있다. 
  수원화성의 장안문과 창룡문이 파괴된 것처럼, 성곽 시설물과 성벽도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도 수원화성은 사람들의 안식처로 기꺼이 자리를 내주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피란민들은 성곽에 기대어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달래면서 살았고, 마침내 수원화성 복원했다. 지금도 수원화성은 성벽에 총탄 자국을 안고 사람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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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수원화성,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방화수류정, 피란민,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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