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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사박물관 수원지역 지명 및 문화의 변천사와 근대 수원의 발전사 전시
여름철 피서도하고 역사공부도 하는 수원박물관
2025-07-03 10:25:22최종 업데이트 : 2025-07-03 10:25:20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역사박물관 입출구

역사박물관 입출구
 

7월은 장마철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폭염과 무더위의 시작이다. 오늘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다.수원의 역사를 취재하기 위해 수원박물관을 방문했다. 수원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1층에는 문화교육관, 어린이체험실, 기획전시실(광복 80년 항거수원 1919 전시 중)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 마음속까지 시원해진다. 2층에는 수원역사박물관과 한국서예박물관관 등 2개의 상설전시관이다.

 

수원역사박물관 전시실은 수원지역의 지명 및 문화의 변천사와 근대 수원의 발전사 전시관이다. 수원의 자연환경, 선사시대부터 삼국,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수원지역에서 발굴된 유물과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은 유물 등 수천여 점의 유물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의 수원, 수원의 물과길, 60년대 수원, 근대수원 100년을 함께 전시해 근대의 수원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수원의 자연환경

수원은 한반도의 중심지인 경기남부에 위치하며, 거대한 광교산의 산세와 수원천의 맑은 물, 안성평야로 이어지는 넓은 곡창지대가 있는 살기 좋은 도시다. 북동 서쪽 외곽으로는 광교 산맥이 둘러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평야로 연결되는 분지이다. 광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광교산, 수원천, 원천천으로 이어져 수원시내를 흘러 황구지천에서 합류하여 안성천을 거쳐 서해로 흘러간다.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


구석기시대 

수원지역에서는 창룡문 외곽의 지동과 동수원 나들목 부근의 이의동에서 중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긁개의 여러 면석기, 몸돌, 각자 등이 채집되었다. 고색동 유적지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 후기의 여러 면석기, 격지, 긁개, 밀개 등이 파장동 유적과 옛 수원지역에 속했던 반월면 대아미리유적(현재 군포시대야미동)에서 후기 구석기시대(4만~1만 년 전)의 긁개, 밀개, 톱날, 주먹대패, 찌르기, 몸돌 등이 수습되었다. 이를 통해 대략 25~20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화서동 꽃뫼 유적과 율천동 유적 및 옛 수원지역이었던 화성 동학산 유적과 반송리 유적 등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편이 채집된 것으로 보아 수원지역에서도 신석기시대(1만 년 전(B, C 2,000~1,500년경) 사람이 정착하여 살아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최근 조사된 광교 신도시 부지 내의 유적에서도 이 시기 집터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원삼국시대
청동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은 수원 및 옛 수원지역에서 다수가 조사되었다. 특히 서둔동 여기산 유적을 비롯한 화서동 꽃뫼유적 율전동유적, 이목동유적, 호매실지구내 유적에서 집터와 유물이 확인되어 수원지역의 청동기 문화양상과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옛 수원 지역에 속했던 화성 동학산유적, 반송리유적, 천천리유적 등 지에서도 마을 유적이  조사되었다. 한편 고색동, 구운동, 금곡동, 당수동 등 호매실동, 오목천동, 율전동, 정자동, 수원지역의 전체에서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오늘날 농촌과 비슷하게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사시대 삼국, 통일신리시대 유물

선사시대 삼국, 통일신리시대 유물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수원


한성백제 시대의 수원
한성백제는 마한 지역 안성천과 한강유역 소국들의 다양한 정치적 경험을하면서 성장한 고대국가이다. 백제는 고이왕 때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비류왕 떄 정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4세기 근초고왕 때 안정적 국가기반을 바탕으로  활발한 대외정복활동을 벌여 경기 충청을 거쳐 전라도에 이르는영역을 넓혔다.

475년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 함으로써 500 여 년의 한성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수원지역은 이른 시기에 백제 세력권에 편입되었으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화성 동탄먹실유적, 발안리의 마을 유적이있다.


한강유역과 수원지역           
수원지역은 서해안과 한강 하류지역에 위치하여 백제, 고구려, 신라를 거치면서 삼국의 문화적 역량을 축적한 지역이다. 백제는 한강유역 및 경기일대의 장악을 통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고 고구려는 중국과 대적할만한 동아시아의 패자로 성장하였으며 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삼국의 문화적 정점에 속했던 수원은 500 여 년간 한성백제의 통치를 받았고 475년부터는 고구려의 매홀로 이후 553년 신라가 이곳을 장악한 이후에는 수성군으로 개청 되어 신주에 속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수원

통일신라시대의 수원과 경기지역은 한산주로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며 대중국 교섭 통로였다. 한산주 일대에는 나당 전쟁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곳으로 통일 초기에는 신라의 국경지역으로서 군사적 중요한 요충지였다.

 

삼국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삼국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고려시대의 수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할 때 수성군의 김진과 최승규 등의 호족세력이 귀순하여 공을 세워 수성군을 수주로 승격시켰다. 수주는 1018년 (현종 9년)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1271년 (현종 12)에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신왕 2)에 수원부가 되었다.

 

주요 시설물로는 고려시대 수원 인물인 효자 최루백의 일화가 실린 오륜행실도 와 그가 직접 지어준 아내 염경애의 묘지석, 창성 사지에 발굴된 수기 등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창성 사지 진각국사탐 복제품과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팔달문 동종이 전시되어 있다. 이밖에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는 고려말 진각국사 천희(千熙1307~1382)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다 팔달문 동종

팔달문 동종은 1080년 개성에서 제작되어 수원부 난의사(萬儀寺)에서 사용하다가 1687년 만의사 주지 도화가 다시 주조하였다.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성씨는 역대 왕실이나 귀족 중에서 주로 쓰이다가 고려 문종 때 이후 널리 사용되었다. 성씨 사용이 확대되면서 본관이 생겼으며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나타났다. 대표적인 성씨로는 수원 김 씨, 수원 이 씨, 수성 최 씨, 수원 백 씨, 수원 방 씨, 수원 볍 씨. 수원 견 씨 등 52개 성씨가 있다.

수원 백 씨 세보

수원 백 씨 세보

 

조선시대의 수원.

정조의 수원 화성 건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읍치가 있던 화산으로 이장했다. 이에 수원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상공업 진흥을 위해 시전을 설치하고 새로운 저수지를 쌓아 둔전을 경영함으로써 자급자족 신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더욱이 화성을 건설하고 화성유수부를 설치함으로써 수원은  서울 남쪽의 대 도회지기 되었다. 화성 건설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백성과 더불어 함께하는 여민((輿民)을 실천하고자 한 군주 정조의 꿈이 담겨있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는 관람객

조선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는 관람객

수원부사 조심태(1740~1799)가 수원부 청사 낙성식에 초대하는 간찰(편지) 내용이다. 조심태는 1789년(정조 13) 수원부사로 임명되어 현륭원 조성. 수원부 읍치 이전 등 중요한 과업을 맡았던 정조의 충신이었다. 사도세자의 무덤 이전이 결정되었을 때에 수원부사로 임명된 조심태는 이후 수원화성 성역에도 감동당상 (監董堂上)이라는 중요 직책을 맡고 수원유수와 정용대장 등을 역임했다.
 

수원부사 조심태가 쓴 간찰

수원부사 조심태가 쓴 간찰

수원의 물과 길

수원은 물고을로 서해를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고구려의 매홀과 신라의 수성. 고려의 수주 등은 모두  '물골'을 뜻한다. 한남정맥의 주봉인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은 서해까지 흐르며 안성천 문화권을  만든다. 수원지역의 물길, 철도, 능행길, 시장길, 축성물자이동, 다리, 도로 등을 점멸선을 이용하여 전시하고 있다.
 

광교산이 발원인 수원의 물길

광교산이 발원인 수원의 물길
 

수원은 전국 6대로(六大路) 중 해남로(제주로) 주요 교통로로 위치하고 있다. 1795년 시흥-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오는 수원대로 가 열리면서 수원은 모든 임금이 찾는 도시가 되었고 1번 국도와 경부선 철도가 이 길을 따라 개설되었다.

 

수인선의 역사 
일제는 여주및 이천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려 1930년 수려선을 개통하고 1937년 서해안의 천일염 을 수탈할 목적으로 수원과 인천을 있는 수인선을 개통했다. 수인선은 수원을 경기남부 교통의 중심으로 거듭나게 했다. 광복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도로망과 전철이 속속 개통되면서 점차 이용객이 줄어든 수려선은 1972년 수인선은 1995년 역사의 뒤안길로 남게 되었다. 지금은 새로운 교통 수요에 의해 수인선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2020년 9월 복선 전철로 수인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수인선 철로길

옛 수인선 철로길

60년대의 수원

근대 수원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대 도회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3.1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난 곳이 수원이었고. 6. 25 전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도시였다.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경기도의 수도로 거듭났다.

60연대 수원의 팔달문, 영화관, 담배가게, 다방, 공설목욕탕, 이발관, 전파사, 양복점, 양장점, 사진관, 쌀가게, 청춘옥 등의 도시를 실물처럼 재연한 모습은 신세대들은 생소하겠지만 70·80대 장년들에게는 옛 추억을 되 새기게 하는 모습들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수원은 (소)갈비와 딸기가 유명했다.

서울, 인천, 평택 등지에서 부자집 한량들이 갈비를 먹기위해 수원을 찾아왔다. 당시 청춘옥(靑春屋)은 수원갈비가 유명해 박정희 대통령도 다녀갔다는 소문이났다. 지금도 수원갈비의 전통을 이어가는 삼오정은 관광객들의 여행 코스이기도하다.

수원은 대(代)를 이은 토박이들과 다양한 이주민들이 숱한 이야기를 만들며 인구 125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겪어온 수원사람들의 삶을 다양한 시대별 유물과 기록  사진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수원의 근대교육

수원지역의 최초의 교육기관은  1896년 설립된 수원군 공립소학교(현 신풍초등학교)였다. 고등교육기관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가 자리 잡았고 뜻 있는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 삼일학교.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중고등학교) 등이 근대 교육을 이끌었다. 이들 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지역사회 성장 발전에 토대가 되어 현재 까지도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팔달산에서 선생임과 함께 1960년대

팔달산에서 선생님과 함께 1960년대


40대로 보이는 한 남성 관람객에게 관람 소감을 물어봤다. "사람들은 족보를 통해 자기 조상들의 뿌리를 알 수 있듯이 수원지역에서 발굴된 유물과 기록 등을 통해 오늘날 수원시 라는 지명이 있기까지 시대별 국가별 수차례의 변화를알 수 있었고 수원의 문화와 역사 발전 과정을 알게되었다" 라고한다. 

현재의 수원은  찬란한 역사의 도시. 문화의 도시. 관광의 도시다. 수원은 외국인들이 찾는 국제관광도시로 거듭났다. 어린이들이 오감으로 즐기고 배우는 어린이체험실, 다채로운 교육 프로그램 등이 운영되고 있다. 여름철 피서도 하고 역사공부도 하는 수원역사박물관을 방문하면 일거양득이 아닐까? 


관람시간: 09:00~18:00(입장은 17:00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 경우 다음날 휴관)
버스 이용시: 5~3, 60, 700-2, 720-1, 3002, 4000 경기대 후문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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