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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과 욕망, 시대를 초월한 청춘 아이콘 에곤 실레를 기리다
살롱 드 아트리움, 모차르트 음악에 녹아든 실레의 표상
2025-06-27 13:33:49최종 업데이트 : 2025-06-27 13:33:46 작성자 : 시민기자 진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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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912. 초등학교 교사가 그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미술학교 진학을 권함.(사진출처:위키백과) 네 그루의 나무들. 1917. 한강의 채식주의자 (민음사 2007~2022)) 표지그림이었다(사진출처:위키백과)
이슬비가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던 25일 오전, SK아트리움에선 300명의 열혈 팬을 모시고 올해의 '살롱 드 아트리움' 마지막 공연이 열렸다. 이 달의 화가 에곤 실레(1890~1918)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로 20세기 초 유럽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강렬한 감정 표현, 왜곡된 인체 묘사, 그리고 성적이고 도발적인 주제로 잘 알려져 있으며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독자적인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클림트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두 위대한 화가로 일컬어지는 에곤 실레. 고전주의를 표방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사랑받는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감상하는 쉴레의 그림이란 말이 필요없는 시간이었다.
에곤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의 툴룬이란 도시에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5년 15살의 쉴레는 오스트리아 빈의 최고의 미술학교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이 무렵 그의 아버지는 일찍 병이 들어 타계했고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싸늘하게 대했다. 대체로 어둡고 시니컬한 그의 화풍은 그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그는 미술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통적 방식에 답답함을 느꼈고 점점 더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에곤 실레의 작품은 어느 장소에 걸려있던 그의 작품임을 척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이 강하고 공격적이며 때로는 불편한 특징을 가지기로 유명하다.
에로틱하고 외설적이라는 평도 받는데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인간 본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까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게 평론가들의 평이다. 쉴레는 르네상스 형식을 완전히 파괴한 채 솔직한 내면을 표현하는 작품에 매진한다. 그는 아이들도 즐겨 그렸는데 미성년자 아이들을 모델로 썼던 것에 대해 고발당하였고 이로 인해 감옥에 수감된다.
연인 발리 노이칠의 초상화. 1912(사진출처:위키백과) 앉아있는 여인. 1912(사진출처:위키백과)
다행히 후방에서 근무하며 그림을 계속할 수는 있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그림에는 전쟁의 불안감, 스페인 독감이란 펜데믹으로 죽음에 대한 아련한 집착, 그리고 가족이라는 새로운 주제가 작품에 담겼는데 단순히 행복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추기경과 수녀. 1912(사진출처:위키백과) 어머니와 두 아들. 1915~1917. 스페인 독감의 두려움일까. 슬픔의 삼각형모양을 하고 있다.(사진출처:위키백과)
오스트리아 최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위대한 화가'란 찬사를 들었던 실레. 당시는 비엔나사회의 규범을 거스르는 예술로 많은 비난과 검열을 받았지만 후대에는 심리적 깊이와 표현의 대담성으로 재평가되기에 이른다. 전쟁과 유행병속에서 28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달리 실레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강렬한 생명력과 존재의 본질로 빛나고 있다.
은둔자들. 1912. 앞은 실레. 뒤는 클림트를 묘사(사진출처:위키백과) 가족. 1918 실레의 미완의 꿈.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 6개월의 아내가 죽고 사흘뒤 쉴레도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쉴레의 마지막 그림.(사진출처:위키백과) 공연이 끝난뒤 쏟아지는 갈채와 갈채
수원SK아트리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로 24~25 공연문의 : 031: 250 -5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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