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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백제 산성‘, 어떤 특징이 있을까?
(사)화성연구회 주관 인문학 강좌
2025-07-14 17:06:53최종 업데이트 : 2025-07-14 17:06:52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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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백제 산성' 인문학 강좌, 서영일 한백문화유산원장 지난 12일 오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사)화성연구회 주관으로 '성곽과 시대의 삶, 찾아가는 미래 – 성곽 프로젝트'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좌가 열렸다. 이날의 주제는 '경기도의 백제 산성'으로 서영일 한백문화유산원장이 강의를 진행했다. 서영일 원장은 역사고고학을 전공하고 여러 산성을 직접 발굴한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도에 분포한 백제 산성에 대해 소개했다. 경기도에 분포한 삼국시대의 산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5세기 전후 한강, 임진강, 충주지역에서 삼국이 어떻게 다투고 있었는지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 백제는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년)대에 이르러 경기도 지역 대부분을 백제의 영토로 만들었다.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년)대에는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를 영토로 만들면서 북쪽으로는 고구려, 남동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하며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다. 백제는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었다. 396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태왕(재위 391-412년)은 백제를 토벌했다. 백제 17대 아신왕(재위 392-405년)은 58개 성과 700촌을 빼앗기고 영구히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경기도의 백제 산성' 인문학 강좌, 서영일 한백문화유산원장 397년경 고구려는 충주지역을 점령했고, 399년 백제가 왜와 신라에 침입하자 신라왕은 고구려왕에 귀의해 구원을 요청했다. 400년 광개토태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 427년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491년)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고 본격적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와 백제는 433년 동맹을 맺었다.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대체적으로 소백산맥을 경계로 대치했다. 470년 신라는 보은에 삼년산성을 축조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해 개로왕이 전사했고 백제는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다. 481년 고구려는 소백산맥을 넘어가 호명성 등 7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 505년부터 분위기가 바뀌면서 신라가 실직(강원도 삼척)을 회복했고 551년에는 백제와 연합해 한강 유역까지 점령했다. 553년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임진강 유역을 경계로 대치했다. 백제가 고구려와 대치하던 4세기경에 백제의 성곽은 주로 임진강 북쪽에 쌓았지만, 오늘날 확인하기가 힘들다. 백제의 성곽이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풍납토성, 몽촌토성, 파주 육계토성, 화성 길성리토성, 포천 고모리산성, 파주 월롱산성 등이 백제 산성이다. '경기도의 백제 산성' 인문학 강좌 백제 평지성의 입지는 강변이나 해안지대, 평야지대 평지에 축조된 것과 구릉이나 낮은 야산을 포함하여 축조한 평산성이 주를 이룬다. 4세기 후반 이후 인구 밀집 지역이나 교통의 분기점에 산성을 축조해 축성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변화가 생겼는데 고구려와 전쟁을 하면서 군사와 행정 거점으로 산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을 돌로 축조하기 시작하는 등 성벽을 축조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석축산성은 석재 가공, 석조 건축의 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국가적 차원에서 장인 계층을 파악하고 장악하였으며 인력 동원을 위한 수취체계가 정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세기 후반에 축조된 백제의 거점산성 중에는 교통의 요지로 전략적 거점에 해당하는 곳에 집중되었다. 이후 신라의 영토가 되면서 신라의 군현성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백제가 활용하였던 산성을 신라가 재사용한 것이다. 반월산성, 설봉산성, 설성산성 등은 5세기 후반까지는 백제 토기가 출토되다가 약 1세기 정도의 공백기를 거쳐 6세기 후반부터는 신라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산성은 누가 처음 축조했는지를 판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를테면 백제가 토성으로 축조했다가 고구려가 빼앗은 후 석성으로 쌓았고, 신라가 빼앗은 후에는 신라 형식으로 고쳐 쌓았을 것이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무너진 곳은 새로 쌓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시설이 추가될 수 있어 현재 시점에서 발굴작업을 한다고 해도 성곽의 정체성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이 든다. 삼국이 국운을 걸고 전쟁을 하던 시기에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군사지원과 보급체계 구축이 필수적이었는데 교통로의 정비와 활용은 기본이었다. 한성 백제의 입지와 주변 지형을 보면 한성에서 방사선 형태로 뻗어 나가는 교통로가 존재했고 교통로를 따라 고갯길이나 도강처에 성곽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의 백제 산성' 인문학 강좌, 설봉산성 성벽 토축 부분 4세기 초반경에는 현재 양주 분지 외곽에서 임진강, 한탄강 일대까지 포천 고모리산성, 파주 월롱산성, 육계토성 등을 축조하며 한성에서 이 지역에 이르는 북방교통로가 먼저 정비되었을 것이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까지 백제의 축성 기록은 임진강, 예성강 북쪽에 집중되는데 고구려와의 전투를 위한 것이었다. 백제의 동방교통로는 이천과 여주, 충주, 청주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남방교통로는 한성에서 탄천을 따라 용인 구성과 신갈을 지나 평택에 이르는 길로 추정된다. 서남방교통로는 과천을 지나 수원과 화성을 거쳐 아산만 일대로 진출하는 교통로였을 것이다. '성곽과 시대의 삶, 찾아가는 미래 – 성곽 프로젝트' 세 번째 강의는 8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에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경기도의 신라 성곽'이란 주제로 한국성곽연구소 심광주 소장이 진행한다. 우리나라 성곽에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열려있는 인문학 강좌이다. ![]()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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