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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방화수류정 현판' 원본 글씨 발견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에 출품돼
2025-07-15 19:11:58최종 업데이트 : 2025-07-15 19:11:56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에 출품된 '방화수류정' 원본 글씨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에 출품된 '방화수류정' 원본 글씨


수원화성 시설물 중에서 가장 풍광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공식 명칭은 동북각루(東北角樓)로 성곽 가운데 밖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에 설치한 군사시설이다. 수원화성에는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각각의 요충지에 설치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 9월 4일 터를 닦기 시작해 10월 19일 완성되었다. 장안문, 팔달문, 화성장대, 북동포루, 북서포루 등과 함께 1794년에 완공된 시설물 중 하나이다. 1795년 윤2월에 있었던 을묘원행인 정조대왕의 8일간의 수원 행차에 앞서 만든 중요한 시설물인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기본적으로 군사시설이지만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정자로서도 탁월함을 갖추고 있다. 정자로서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은 운치 있으면서도 잘 어울리는데, 북송의 성리학자인 정명도의 시 '춘일우성(春日偶成)'의 '방화수류과전천'이란 시 구절에서 따다 붙인 것이다.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 방인불식여심락(傍人不識余心樂) 장위투한학소년(將謂偸閑學少年) 맑은 구름 가벼운 바람에 한낮 하늘이 가까이 있고, 꽃을 찾아 버들을 따라 냇물을 건넌다. 사람들은 나의 즐거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공부 안하고 어린애처럼 논다고 놀려대네'

수원화성 시설물인 동북각루를 방화수류정이라 명명한 것은 정조대왕이다. 홍재전서 제177권 일득록 17 훈어 4편에 보면 화성의 편액은 모두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팔달문(八達門)은 산의 이름이 팔달이므로 문도 팔달이라고 하여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이는 뜻을 취한 것이고, 장안문(長安門)은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원침을 바라보아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리는 뜻을 취한 것이고, 화홍문(華虹門)은 나타난 무지개가 달처럼 화성의 못에 내려 비추는 뜻을 취한 것이고, 창룡문(蒼龍門)은 그 형상을 취한 것이고, 서화문(西華門, 화서문)은 그 방향을 분별한 것이고,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꽃이 핀 산과 버들이 늘어진 냇가의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 광평대군 후손인 철기 이범석, 승지공 이윤종, 열사 이위종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 광평대군 후손인 철기 이범석, 승지공 이윤종, 열사 이위종


'방화수류정' 현판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었던 송하 조윤형(1725-1799)이 썼다. 조윤형은 장안문, 팔달문, 신풍루, 낙남헌, 봉수당 글씨도 썼다. 방화수류정 원본 현판은 한국전쟁 전후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1956년 원곡 김기승이 행서체로 쓴 현판이 새롭게 제작되어 걸렸다. 이후에 일제강점기의 방화수류정 사진자료가 발굴되면서 현재의 현판을 조윤형의 글씨로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사진 속의 글씨가 선명해 완전하게 조윤형의 글씨로 복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방화수류정 현판은 확인 가능한 사진으로 봤을 때 1941년까지는 원본이 붙어있었다. 1941년 제작한 '반도의 봄'이란 영화 속에서 방화수류정 현판 위에 오리정(五里亭)이라는 종이를 덧붙인 모습이 보인다. 종이 뒤 현판이 확인 가능한 1930년대 현판의 모습과 같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사진, 원본 현판이 걸려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사진, 원본 현판이 걸려있다.


최근 서울 강남구 밀알미술관 운보홀에서 열리고 있는 '필경재가 간직한 600년,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에서 '방화수류정' 원본 글씨가 발견되었다. 글씨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약간의 행서기가 있는 해서체로 다소 거친 것처럼 보이지만 운필이 자유롭고 대가로서의 필력이 돋보이는 글씨이다. 글자 하나 크기가 가로 37cm, 세로 47.5cm로 전체 길이는 185cm에 달한다. 

'방화수류정' 글씨는 직접 붓으로 쓴 것처럼 보였지만 탁본 글씨이다. 탁본 글씨가 붓글씨처럼 보이는 것은 쌍구전묵법으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쌍구전묵법이란 1차적으로 현판을 탁본한 후 그 탁본 위에 투명한 종이를 올려 글자의 윤곽을 따라 그린 뒤 그 안을 먹으로 채우는 방법이다. 이렇게 복제하는 것은 매우 정교하기 때문에 진본과 거의 유사하다.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며 천하제일행서라는 '난정서', '광개토태왕비문'도 쌍구전묵법으로 탁본한 것이 있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이번에 발견된 '방화수류정' 글씨는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 속 글씨와도 똑같다. 이러한 탁본 글씨가 남아있는 이유는, 당대에 현판 글씨를 쓰면 현판에 새긴 후 현판 글씨를 탁본해 보관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다. 원본이 발견된 이상 현재의 현판을 교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당대의 글씨 현판이야말로 역사적 정체성을 오롯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1797년 1월 정조대왕이 방화수류정에서 쓴 시를 채제공이 현판으로 새겼다고 하는 시 현판도 제작해 방화수류정 내부에 걸었으면 한다. 서예와 금석학을 모르는 사람들의 반대는 문제될 것이 없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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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방화수류정, 광평대군, 조윤형, 김기승,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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