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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루 현판 원본 모습은?
신풍루의 원래 이름, 조심태가 쓴 진남루 현판 글씨 확인
2025-07-28 14:30:03최종 업데이트 : 2025-07-28 14:30:00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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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1911년 노르베르트 베버가 찍은 사진이다. [사진출처]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1789년 화성행궁을 처음 지을 당시의 정문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진남이란 '남쪽을 진압하다'라는 말로 '한양의 남쪽에 있는 신도시 수원이 삼남을 제어하는 큰 고을'이란 뜻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성곽의 남쪽 대문이나 남쪽에 있는 누각에 많이 사용한 이름 이기도 하다. 수원에서 가까운 독산성의 남쪽 초루 이름도 진남루였다. 화성행궁 진남루 현판 글씨는 조심태가 썼다. 조심태는 정조대왕의 충신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전하고 신도시 수원을 건설했으며 이후 화성유수가 되어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무인이었지만 문무를 겸비하고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화성행궁 안에 있는 현판 글씨도 여럿 썼다고 한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을묘년원행에 앞서 화성행궁의 건축물들을 새로 짓거나 확장하면서 1795년 건물의 명칭을 진남루에서 신풍루(新豊樓)로 바꾸고 현판 글씨는 조윤형이 썼다.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훼철되면서 신풍루 글씨도 사라졌다. 2002년 화성행궁을 복원할 당시에 신풍루 현판도 복원했다. 복원 당시의 기록을 보면, 1910년대 흑백사진 속의 희미한 신풍루 글씨를 보고 복원했다고 한다. 수원박물관은 '진남루 현판 탑본'을 소장하고 있다. '진남'이란 큰 글씨와 '진'자 옆에 정조의 어제 시가 배접 되어 있다. 2018년 수원화성박물관 특별기획전 '수원의 궁궐 화성행궁'에서 처음으로 봤는데 조심태 글씨로 추정된다는 설명을 봤다. 조심태 글씨를 본적이 없어 궁금했었다. 노르베르트 베버가 1911년 찍은 신풍루 사진 확대 모습 탑본에 있는 정조의 어제 시는 '新豐樓下路逶遲(신풍루하로위지) 신풍루 아래는 길이 꼬불꼬불 더디어라 爲誦南來北望詩(위송남래북망시) 남녘서 북녘 바라보는 시를 외워나 보자. 長樂鍾聲知不遠(장락종성지불원) 장락궁 종소리가 멀지 않으니 那堪回首寢園辭(나감회수침원사) 머리 돌려 침원을 어이 하직한단 말인가.'로 채제공의 시에 화운한 것이다.[시 해석은 홍재전서에서] 채제공의 시는 '宮庭立馬便依遲(궁정입마편의지) 궁정에 말 세우고 머뭇머뭇 망설이며 親誦君臣母子詩(친송군신모자시) 군신 모자 고인 시 임금 친히 읊으셨네. 歸覲淸光知在邇(귀근청광지재이) 자궁 어서 뵈려는 그 뜻을 알겠기에 微誠不忍遽爲辭(미성불인거위사) 뒤에 오라는 분부를 차마 사양 못 했다네.'이다. 채제공 시에서 첫 번째 구의 마지막 글자 '지(遲)', 두 번째 구 마지막 글자 '시(詩)', 네 번째 구 마지막 글자 '사(辭)'자를 똑같이 쓰는 것을 화운시, 갱재시라고 한다.[시 해석은 번암집에서] 수원박물관이 소장한 '진남루 현판 탑본' [사진] 2018년 수원화성박물관 특별기획전 '수원의 궁궐 화성행궁' 도록 정조대왕이 수원을 올 때마다 채제공이 쓴 시에 화운한 시가 많이 있는데 위 정조대왕의 시는 1796년 수원을 방문하고 환궁하던 날 지은 것이다. 정조 어제 시 뒤에는 '상지 이십년 병진춘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上之 二十年 丙辰春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자 까지만 나오고 뒷부분은 없어졌다. '의'자 뒤로 이어진 말은 '정부 좌의정 신 채제공 봉교근서(政府 左議政 臣 蔡濟恭 奉敎謹書)'로 추정된다. 이 말은 정조 20년(1796년) 봄에 정조대왕의 명으로 좌의정 채제공이 글씨를 쓰고 현판에 새겼다는 뜻이다. 1796년에 채제공의 시에 정조대왕이 화운한 시 중에서 '홍범산과 봉조산 등 여러 산을 순행하고 밤중에 화성 행궁으로 돌아와 정리대신 채원보 제공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것이 있는데 국립고궁박물관에 시 현판이 남아있다. 어제 시 뒤에 '상지 이십 년 병진춘 이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신 채제공 봉교근서((上之 二十年 丙辰春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臣 蔡濟恭 奉敎謹書)'라고 새겨져 있어 위 탑본에서 '의'자 뒤에 사라진 글씨들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노르베르트 베버가 1911년 찍은 신풍루 사진 속에 있는 '진남루' 현판 진남루 현판 탑본은 1795년 진남루 현판을 떼어서 탑본을 만들고 이후 정조 어제 시 현판 탑본을 함께 배접한 것으로 1796년 2월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최근에 '진남'이란 글씨가 조심태 글씨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 사진을 찾았다. 이 사진은 수원시 유중현 학예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홈페이지에 노르베르트 베버가 1911년 찍은 신풍루 사진이 있는데 2층 누각 안에 '진남'이란 글씨가 선명한 사진이다. 수원박물관이 소장한 '진남루 현판 탑본'에 있는 '진남'이란 글씨와 정밀하게 비교해본 결과 같은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신풍루 현판이 걸린 이후 진남루 현판은 신풍루 2층 누각에 걸려있었다. 1899년 편찬한 수원군읍지에는 신풍루에는 '신풍루 현판 1좌', '진남루 현판 1좌', '어제 현판 1좌', '상량문 현판 1좌'라고 기록하고 있어 신풍루 안에 '진남루', '정조 어제 시' 현판이 함께 걸려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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