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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기념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 기획전
2025-08-11 10:29:54최종 업데이트 : 2025-08-11 10:29:50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광복 80주년을 맞아 8월 26일까지 기억공간 '잇-다'에서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 기획전이 열린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8월 26일까지 기억공간 '잇-다'에서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 기획전이 열린다.


  수원시(시장 이재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8월 26일까지 기억공간 '잇-다'에서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 기획전을 연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을 의미한다. 전시장에는 김향화, 이선경, 차인재, 최문순, 최경창, 홍종례, 이현경, 전현석 등 8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한다. 여성 독립운동가 국립여성사전시관 순회전시도 함께 구성됐다.

  수원 지역에서 여성으로 만세운동 활동의 포문을 연 지사는 김향화다. 수원 예기 조합에 소속돼 있던 교육생들과 함께 화성행궁 봉수당에 설치된 수원 자혜의원에 위생 검사를 받으러 갔다. 기생들은 일본 경찰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 이에 1919년 3월 29일 김향화와 기생들은 저항하며 만세를 외쳤다. 김향화는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선경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부른다. 일제의 폭력적 고문으로 19살에 하늘에 별이 됐다.

이선경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부른다. 일제의 폭력적 고문으로 19살에 하늘에 별이 됐다.


  국립여성사전시관 배너에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 이야기가 있다. 좁고 어두운 형무소에 앳된 17살의 소녀 유관순 등 9명이 갇혀 있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함께 노래하며 힘든 옥중 생활을 견뎠다고 한다. 이 중에는 수원 출신 김향화도 함께 있었다. 이는 다큐멘터리 영화 <1919 유관순>에도 나온다. 감옥에서 동료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상상만 해도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기생으로서 만세운동을 한 것도 역사적 의미가 깊다. 

  이선경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부른다. 어린 나이에 하늘에 별이 된 것이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수원공립보통학교(지금의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산루리에서 서울로 통학하며 공부했다. 조선 독립을 목표로 한 구국민단 사건으로 체포됐다.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9일 뒤 세상과 이별했다. 일제의 폭력적 고문 때문이었다. 19살이었다. 사진도 하나 남기지 못해 안내판에는 이름이 쓰여 있는 서류가 대신 차지했다. 
 
전시 공간은 좁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들 활동과 의미는 크게 울린다.

전시 공간은 좁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들 활동과 의미는 크게 울린다.


  전시장 국립여성사전시관 배너에는 독립과 건국에 공로가 있는 분들에게 건국훈장 5등급과 대통령 표창을 주는 설명이 있다. 이선경은 4등급에 해당하는 애국장을 받았다. 높은 등급을 받지 못해 아쉽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1등급의 훈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선경의 언니 이현경도 독립운동가다. 일본 유학 중에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체포됐다. 전국적인 여성운동 조직에서 민족 계몽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중국 망명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국가 서훈도 받지 못했다. 역사적 자료가 없어서다. 안타깝다.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전현석도 광복을 못 보고 별이 됐다. 그녀는 남편이 독립군 임면수다. 남편과 함께 수원에서 만주로, 평양을 거쳐 수원까지 남편과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만주에서 숙박업을 하며 독립운동가를 치료하는 등 지원했다. 동료들은 이 모습에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1930년 남편 임면수가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자, 2년 뒤 생을 마감했다.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이야기. 좁고 어두운 형무소에 유관순, 김향화 등 9명이 갇혀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이야기. 좁고 어두운 형무소에 유관순, 김향화 등 9명이 갇혀 있었다.


  차인재는 삼일여학교를 거쳐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이후 삼일여학교 교사로 박선태 등과 함께 구국민단에 참여했다. 미국으로 이주 후에도 광복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 최문순은 남수리 출신으로 삼일여학교를 졸업했다. 이화학당 재학 중에 이선경 등과 함께 구국민단에 참여했다. 최경창과 홍종례는 수원군 성호면 세교리 출신이다. 둘은 마을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사회 개혁을 위해 공장에서 노동 운동을 했다. 1936년 사회주의 조직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검거됐다. 둘은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5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건국 이후 둘 다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함께 진행하는 국립여성사전시관 순회전시도 볼만하다. 3·1운동, 임시정부, 우리 가족은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관련 유물, 우리나라 옛날 태극기 등 교육용으로 제작한 배너가 보인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함께 진행하는 국립여성사전시관 배너.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함께 진행하는 국립여성사전시관 배너.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전통 사회에서 여성들은 홀대를 받았다. 홀대가 아니라 축첩, 조혼, 과부 개가 금지 등 오랜 사회적 차별은 가혹한 고통을 주었다. 여성의 권리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탈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강점기 같은 모순의 시대에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무력에 의해 쉽게 짓밟히기 일쑤였다.
  다행히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여성들도 배움의 길에 들어선다. 이때부터 유교적 여성관에서 탈피하는 사회적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에 여성 참여는 이렇게 시작됐다. 민족적 비극 앞에 여성들의 참여는 어느 지원보다 큰 힘이 됐다.
 
  일제의 침탈로 지독한 비극을 겪었던 시기에 여성들은 교육, 사회 운동, 항일투쟁 등에서 활약했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과 계층도 제각각이었지만, 나라 찾기 위한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았다. 여성들의 용기와 헌신이 역사를 넘어 가슴속에 뭉클 다가온다. 전시관 기억공간 '잇-다'는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고통 속에서도 제국에 저항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 활동과 의미는 크게 울린다. 그들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보면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우리 가슴도 뜨거워진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고, 일·월·공휴일은 휴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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