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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루 현판 글씨 원래 모습에서 변형
방화수류정, 장안문, 신풍루 현판, 원형으로 교체해야
2025-08-11 14:18:15최종 업데이트 : 2025-08-11 14:18:14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1789년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고 화성행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 화성행궁의 정문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이후 화성행궁 건축물을 증축하면서 1795년 건물의 명칭을 진남루에서 신풍루(新豊樓)로 바꾸고 현판 글씨는 조윤형이 썼다. 

일제에 의해 화성행궁이 훼철되면서 신풍루가 헐리고 신풍루 현판도 사라졌다. 2002년 화성행궁을 복원할 당시에 신풍루 현판도 복원했다. 복원 당시의 기록을 보면, 1910년대 흑백사진 속의 희미한 신풍루 글씨를 보고 복원했다고 한다. 사진이 작고 흐릿해서 현판 글씨로 사용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사진을 확대한 후 조윤형 글씨의 특징을 살려 신풍루 현판을 제작했다고 한다. 현판 제작은 MBC 미술부가 주관하여 복원했다고 한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1907년과 2025년 모습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1907년과 2025년 모습


화성행궁 복원 이후 신풍루를 찍은 옛 사진들이 여러 장 발굴되었다. 사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은 1907년 헤르만 산더가 찍은 신풍루 사진이다. 신풍교 앞에서 신풍루를 찍은 사진으로 좌우에 느티나무가 살짝 보이고 고풍스러운 신풍루가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1층 삼문 중 왼쪽 문은 닫혀있고 가운데 문은 반만 닫혀있고 오른쪽 문은 열려있다. 흑백사진이지만 문에 삼태극이 선명하다. 2층 누각 왼쪽에는 북이 매달려 있다. 처마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신풍루 현판이 붙어있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1907년과 2025년 현판 글씨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1907년과 2025년 현판 글씨

 
'한글본 정리의궤 39권 성역도'에 있는 채색본 신풍루도를 보면, 대문 색상이 다자색(삼태극의 검은색과 비교하면 연한 색이다)인 신풍루, 좌익문 삼문에는 삼태극(검은색, 흰색, 초록색)이 그려져 있고, 신풍루 2층 누각 왼쪽에 북이 매달려 있다. 현판 위치에는 창방 위로 글씨는 없지만, 현판 모형이 붙어있다.

1911년 노르베르트 베버가 찍은 신풍루 사진이 있다. 헤르만 산더의 사진보다 더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1층 삼문의 문이 보이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다만 신풍루 바로 앞에서 찍은 사진이라 신풍루 글씨가 선명하고 2층 누각 안에 진남루 글씨도 선명하게 보인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1911년 노르베르트 베버가 찍은 사진 [사진출처]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1911년 노르베르트 베버가 찍은 사진 [사진출처]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두 사진 모두 신풍루 현판의 위치를 보면 오늘날의 현판처럼 창방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았다. 2층 누각 내부에 보이는 진남루 현판도 창방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현재의 신풍루 현판이 창방 아래로 처진 것은 화성행궁을 복원하면서 현판을 원래 것보다 크게 복원했거나 신풍루 2층을 낮게 복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봉수당 현판이 창방 밑으로 많이 처진 것과 비슷하다. 통행에 불편할 정도인데 봉수당 현판은 원본을 복제한 것이므로 봉수당 자체를 낮게 복원했다고밖에 달리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현판의 크기도 문제지만 중요한 것은 조윤형이 쓴 신풍루 글씨가 많이 변형되어 원본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예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원형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글씨의 획을 자세히 보면 원형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 조윤형이 쓴 방화수류정 현판 글씨

수원화성 축성 당시 조윤형이 쓴 방화수류정 현판 글씨


신(新)자의 오른쪽 획인 '도끼 근(斤)'의 세로획, 풍(豊)자의 세로획과 가로획, 루(樓)자의 왼쪽 획인 '나무 목(木)'의 세로획, '끌 루(婁)'의 자형 등 전체적인 결구가 원본과 다르기 때문에 조윤형의 글씨로 볼만한 요소가 거의 없다. 당대에 조윤형이 쓴 팔달문, 장안문, 봉수당, 낙남헌 글씨와 비교해봐도 조윤형 글씨의 특징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예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처럼 복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붓 맛이 없어 서예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글씨이다.

최근에 조윤형이 쓴 방화수류정 현판 원본 글씨가 발견되었다. 조속히 조윤형 글씨로 교체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장안문 현판 글씨도 조윤형 글씨로 복원해 교체해야 한다. 옛 장안문 사진에서 글씨의 원형을 볼 수 있다. 현판을 교체하면 기존에 걸려있던 현판은 누각 안에 걸어두면 된다. 정체성을 살리면서 후대의 역사도 보존하는 차원이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 조윤형이 쓴 장안문 현판 글씨

수원화성 축성 당시 조윤형이 쓴 장안문 현판 글씨


화성장대에는 정조대왕이 직접 쓴 화성장대 현판과 장대 안에 정조대왕의 시 현판이 걸려있어 격조와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정조대왕이 쓴 시가 화성행궁의 신풍루, 낙남헌 등과 수원화성 장안문, 방화수류정 등의 건축물에 시 현판으로 여럿이 걸려있었다. 이번 기회에 시 현판도 복원해 걸어두면 좋겠다. 

수원화성, 화성행궁의 정체성은 현재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전승하는 과정에서 찾는 것이다. 과거에 머무르면 박제된 역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현재의 관점과 해석을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역사를 무시하는 오류는 절대 불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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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루, 방화수류정, 장안문, 현판,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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