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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성곽답사 시즌Ⅱ "단풍(丹楓) 속을 거닐다"
화성연구회, 용인 할미산성·안성 죽주산성·처인성을 돌아보다
2025-11-11 13:14:28최종 업데이트 : 2025-11-12 11:02:34 작성자 : 시민기자 진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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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아름다운 '용인 선장산 정상 할미산성'에서 단체사진
지난 8일 토요일 화성연구회는 10월에 있던 1차 백제산성 답사에 이어 이날 신라산성 답사에 나섰다. 이 답사는 2025 경기도문화유산활용사업인 '성곽과 시대의 삶, 찾아가는 미래' 프로젝트의 마무리 프로그램이다. 아침 8시 30분 화성행궁광장에서 23명의 참가자는 버스를 타고 용인 할미산성으로 향했다. 버스는 40분 만에 용인 할미산성 오르는 입구에 도착한다.
조선 전기의 학자 양성지(1415~1482)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말했다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성곽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국경을 보존하여 적을 막은 것은 모두 산성을 이롭게 이용한 때문이며 상대의 적이 꺼린 것도 오직 산성에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낙엽을 밟으며 할미산성 가는 길
6세기 중엽이후 신라는 한강 유역에 진출하며 고구려 및 백제와의 각축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한강 이북과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전략 요충지에 대규모 석축산성을 집중적으로 축조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사거점 확보를 넘어, 점령지역의 안정적 통치와 지속적 방어를 위한 계획적 성곽 체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경기도 일대 신라 성곽은 정복 이후 통합과 지배를 위한 국가전략의 실현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날의 강사인 한정규 화성연구회 모니터링위원장은 "신라산성의 변화를 보면 신라가 경상도 쪽에 머물렀을 때는 성을 그다지 잘 쌓지 못했다.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와서 성을 쌓는데 충주주변에 강 남쪽에 쌓은 것들이 가장 유명하다.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게 551년인데 신라가 나제동맹(433년)을 배신을 해서 백제를 치고 단독으로 한강을 차지한 것이다"라고 설명을 시작한다. 남한산성은 고려시대에 몽골군을 크게 무찌른 곳이고 신라가 쌓은 산성은 교통의 요충지 중에 목덜미같은 위치에 많이 포진하고 있다고 한다.
한정규 강사가 할미산성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서 수원화성까지 이어진다나?
버스에서 내려서 일행은 산 정상으로 향한다. 입구에 있는 동백저수지가 단풍으로 아름답고 오르는 길이 해발 349m(선장산)로 주로 비탈길이어서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추색이 완연한 단풍속으로 걷는 고즈넉한 오솔길이 여정의 고단함을 달래준다.
용인 지역은 예로부터 수도권 남쪽 방어선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광교산(임진왜란 때는 용인에 속함), 석성산등과 함께 군사적 방어체계의 일부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이 일대는 연락망 및 봉화대가 있었다고 한다. 약 35분 오르니 할미산성 정상이 나타난다. 억새가 아름다운 정상에서 보니 사통팔달로 사방이 다 보이고 과연 이곳의 중요성이 보인다. 할미산성은 선장산 정상을 둘러싼 퇴메식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661m라고 한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인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보인다. 성벽 일부만 복원했고 대부분은 무너져 내린채 돌무더기만 있다. 1500년 전의 돌 성벽은 세월의 이끼를 덮고 무념무상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왜 할미산성인가 하니 한 할머니가 끝까지 적을 물리치다 전사하여 할머니의 충절을 기려 그리 불렀다 한다. 신라산성은 신라 때 쌓은 성, 고려 때 쌓은 성, 조선시대 임란 이후에 쌓은 성등 삼중으로 돼 있는 곳이 많단다.
온 산하가 단풍! 단풍! 용인 죽전휴게소 근방
일행은 용인 죽전휴게소 부근의 한 음식점에서 두부전골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안성 죽주산성으로 향했다. 죽주산성은 6세기 중반경 신라가 충주 지역을 차지한 이후 북진하는 과정에서 축조한 성이다. 죽주산성에서 조망할 수 있는 죽산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있다. 삼국시대부터 전력적 요충지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도성 방어에 중요했다.
죽주산성은 죽주성, 매성으로 불렸으며 몽골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고 임진왜란 때도 격전지였다 한다. 해발 약 372m의 비봉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으로 안성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죽주산성은 처음에는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신라가 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죽주산성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군사적 중요성때문에 여러시기에 걸쳐 고쳐서 쌓으면서 만들어진 구조라고 한다.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삼국시대에 쌓아서 조선시대까지 사용한 산성이다. 전체둘레는 약 1,688m이고 높이는 약 6~8m였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3m내외로 보이며 포곡식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이란 산 정상부에 계곡을 포용하고 내려 온 능선부에 성벽을 축조한 것을 이름이다. 죽주산성은 3차례이상 수축한 흔적이 보이며 부분적으로 보축성벽(성벽의 바깥에 추가로 쌓는 구조물)이 보인다. 보축 성벽은 한강 유역 신라산성중 가장 빠른 시기의 성벽이라고 한다.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여 단면 삼각형의 형태로 외벽 하단부를 덮은 형태이다. 수원화성의 축성법등과 이모저모 비교해 보는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성벽 길 중간중간에는 멋진 노송이 반긴다. 소나무만 보이면 잠시 소나무밑에서 성밖으로 펼쳐진 풍광을 감상해도 좋다. 또한 북포루옆에는 큰 오동나무가 덩그러니 서 있는데 참으로 운치가 있다. 조선시대 영의정이자 문장가이며 군인 외교관이었던 상촌 신흠(1566~1628)의 시를 여기에 적어본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한 평생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번을 이지러지더라도 그 본래의 성질이 남아있으며 버드나무는 백번 꺾이더라도 또 새로운 가지가 올라온다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문인이 지은 시이기에 그의 시가 더 운치있고 격조있게 들린다. 답사팀은 다시 용인 처인성으로 향한다. 용인시 처인성에서 단체사진
처인성은 용인시 남사면에 있는 산성으로 흙으로 성벽을 쌓아올렸다. 고려 고종때 몽골군이 침입하였을 때 몽골군을 물리친 것이 유명하다. 성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그 흔적만 남아있다. 처인성은 낮은 구릉의 경사면을 최대한 이용하여 흙으로 성벽을 쌓은 작은 규모의 토루이며 둘레가 약 350m이다. 일행은 천천히 둘레를 돌아보며 역사의 뒤안길을 산책하였다. 귀가하는 버스안에서 다들 소감 한 마디씩 전한다. 오효숙 씨는 "이번에 화성연구회 성곽답사 처음 참여해 보았는데 신라산성이 이렇구나 공감할수 있었고 산성밑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정말 요새중에 요새였구나 실감케 되고 강사님이 너무 설명을 잘해 주셔서 역사공부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친구들과 멋진 가을여행도 했다는 생각이다"라고 소감을 전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타는 듯한 단풍을 가족과 친구와 함께 구경하면서 옛날로 거슬러 가보는 운치있는 역사문화기행. 경기도 또는 전국에 소재한 성곽에 얽힌 소중한 우리문화역사를 하나 하나 답사하러 다니다보면 머지 않아 해박한 지식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여 본다. 성곽답사기행은 수원시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내년에도 계속되니 시민들은 사)화성연구회에 관심 가질 만하다. 한편 '2025 다시 읽는 조건의 진경' 강연 2회차가 11일 화요일 저녁 6시에 있으니 시민들의 많은 참석 바란다. 장소는 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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