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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마지막 모니터링, 방화수류정에서 본 화성의 시간
2025-12-04 14:27:49최종 업데이트 : 2025-12-04 14:27:47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은행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있던 마지막 잎새가 스치는 바람에 부르르 떨며 늦가을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12월이 시작되면서 앙상한 가지만이 남았다. 요즘 계절의 변화는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늦가을임에도 포근하다가 춥고, 추웠다가 덥기도 하지만 점차 겨울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세월은 화살처럼 빨라 2025년의 달력도 1장만을 남겨놓고 있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던 지난 2일 오후 (사)화성연구회 모니터링분과에서는 2025년 마지막 모니터링을 실시했다. 이날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방화수류정에 얽힌 역사적 측면, 건축적인 측면, 콘텐츠 측면, 현판 이야기 등을 입체적으로 알아봤다.

현재 방화수류정 내부에는 몇 년째 들어갈 수가 없는 상태이다. '방화수류정(보물)은 2025년 정밀안전진단 결과 보수정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보수 절차가 진행 중이며 보수 완료 시까지 추가적 변형 방지를 위해 관람객 출입을 제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정조대왕은 1793년 12월 8일 대신들과 수원화성 축성에 대해 논의했다. 대신들이 모름지기 널리 상고하여 자세히 헤아려 후세 사람들에게 오늘날 조정에 인재가 있었음을 알게 하라고 하면서 "보기에 아름답기만 하고 견고하지 못하면 참으로 좋지 않고, 보기에 아름다워야 또한 지키고 적을 막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된다. 병법에서 '상대방이 기를 빼앗기게 한다.' 하였으니, 한나라 때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을 크게 지으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못하면 위엄이 서지 못한다.' 한 것이 또한 이러한 뜻이다. 누조와 오성지의 제도도 또한 상의하여 확정하고 방법을 강구하여 고금의 아름다운 제도가 다 갖춰지게 하라."라고 축성의 원칙을 말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웅장하고 미려한 것도 족히 적의 기세를 빼앗기위한 방법이 되기에 충분하다. 고금의 아름다운 제도를 화성에 모두 갖추도록 하라는 말로 '웅려탈기 고금미제(雄麗奪氣 古今美制)'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수원화성 시설이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동북포루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동북포루


정조대왕의 저서인 홍재전서에는 수원화성 편액들은 모두 의미가 있다고 하며 화홍문(華虹門)은 나타난 무지개가 달처럼 화성의 못에 내려 비추는 뜻을 취한 것이고,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꽃이 핀 산과 버들이 늘어진 냇가의 뜻을 취한 것이라고 이름을 지은 배경을 설명했다.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은 북송시대 성리학자인 정명도의 '춘일우성(春日偶成)'이란 시에서 '방화수류과전천' 구절을 따다 붙인 것이다.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 맑은 구름 가벼운 바람에 한낮 하늘이 가까이 있고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 / 꽃을 찾아 버들을 따라 냇물을 건너네.
방인불식여심락(傍人不識余心樂) / 사람들은 나의 즐거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장위투한학소년(將謂偸閑學少年) / 오히려 공부 안 하고 어린애처럼 논다고 놀려대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용연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용연



방화수류정 현판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었던 조윤형이 해서체로 썼다. 1933년 8월에 전면 보수하면서 누각 마루로 올라가는 계단 2개 중 북쪽 계단은 그대로 두고 서쪽 계단은 없앴는데 그때 사진에도 조윤형 글씨가 붙어있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란 영화에는 방화수류정 현판 위에 '오리정'이란 글씨를 붙였는데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늦은 시기이다. 이후 언젠가 사라졌고 1956년 김기승의 행서체 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 

지난여름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회를 통해 조윤형이 쓴 방화수류정 현판 원본 글씨가 발견되었다. 붓으로 직접 쓴 것처럼 붓이 예리하게 갈라진 맛까지 보이지만 탁본한 글씨이다. 양각 글씨인 현판을 글자의 윤곽을 따라 그린 뒤 그 안을 먹으로 채우는 쌍구전묵법으로 탁본했기 때문에 정교하게 보이는 것이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모니터링 회원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모니터링 회원들



정조대왕은 1797년 1월 29일 수원화성이 완공된 이후 처음으로 수원화성을 둘러봤다.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한 후 시 한 수를 지었다.

역편춘성일미사(歷遍春城日未斜) / 봄날 화성을 두루 보고도 해가 아직 한창인데 
소정운물전청가(小亭雲物轉晴佳) / 방화수류정의 풍경은 한결 더 맑고 아름답도다.
난기관보삼연묘(鑾旂慣報參連妙) / 난기가 계속 삼련의 적중함을 보고하니 
만류음중촉사화(萬柳陰中簇似花) / 수많은 버들 그늘 속에 살촉이 꽃 같구려.


함께 있던 신하들에게도 차운하여 화답시를 지으라 했는데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지은 시가 번암집에 실려있다. 이날 정조대왕을 수행했던 여러 대신의 화답시도 그들의 문집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7언절구 이면서 첫 번째 구의 마지막 글자인 사(斜), 두 번째 구의 마지막 글자인 가(佳), 네 번째 구의 마지막 글자인 화(花)자가 같은 것이 화운시 혹은 갱재시라고 한다.

모니터링을 마치고 올 한해의 모니터링 활동을 정리하고 2026년 모니터링 활동 계획을 세웠다. 수원화성을 모니터링 하면서 서울에 있는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의 백제성과 충주지역의 적성산성 등 주변 성곽을 비교 답사 할 예정이다. 비교 답사를 통해 수원화성을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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