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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긁어내고 시간을 흘려보내다, 캔버스에 피어난 권준옥 '발현'
질감으로 번역된 내면 시간,수원시립북수원전시관에서 열린 권준옥 작가 첫 개인전 탐방기
2025-12-08 13:46:18최종 업데이트 : 2025-12-07 15:59:29 작성자 : 시민기자 강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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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립북수원전시관에서 열린 권준옥 작가 첫 개인전 《발현》 전시장 전경. 넓은 공간에 다채로운 색감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관람객을 맞이한다. 권준옥 작가 첫 번째 개인전 '발현(發現, Emergence)'이 12월 2일부터 7일까지 북수원시립전시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오랜 시간 내면에 응축해 온 감정과 기억을 캔버스 위로 끌어올린 결과물이다.전시 제목인 '발현'이 암시하듯, 그동안 겹겹이 쌓아 올린 작가 조형 언어가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온 순간을 목격할 수 있는 자리다. 전시장는 혼합 재료(Mixed Media)를 사용해 두터운 질감을 살린 반추상 회화 20여 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화이트 큐브의 기둥 사이로 작품들이 리듬감 있게 배치되어 있다. 관람객은 이 공간을 거닐며 작가가 펼쳐놓은 기억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강렬한 색채 대비와 거친 마티에르(질감)다. 권준옥은 꽃과 정물, 풍경 등 일상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쩌면 사소하고 하찮아 보일 수 있는 대상들을 캔버스로 불러들였다.하지만 이를 재현하는 방식은 결대 가볍지 않다. 화이트 큐브 벽면을 채운 붉은색과 푸른색의 과감한 보색 대비는 단순한 시각적 자극을 넘어, 작가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심성과 감정 파동을 색으로 치환해 보여주는 듯하다. 전시장 벽면은 붉은색과 푸른색 계열의 작품이 교차 배치되어 시각적인 긴장감과 리듬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예쁜 꽃그림을 감상하는 자리가 아니다. 물감을 바르고, 긁어내고, 흘려보내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 시간을 기록하려는 화가의 치열한 고군분투가 담겨 있다. 작가는 "꽃을 그리지만, 그것을 꽃이라 부르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꽃이나 유리병 같은 소재는 식물학적인 대상이 아니라 계절과 기억, 그리고 작가의 경험이 응축되어 남긴 흔적이다.
작품 <응결>. 붉은색의 강렬한 배경과 꽃의 이미지가 대비를 이룬다. 빛과 색이 만들어내는 다층적 공간 속에서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느슨하게 드러난다. 작품 <경계면>이나 <문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과 화병의 형상은 기하학적인 배경 속으로 침범하거나 해체되고 있다.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매끈하게 묘사하는 대신, 작가가 기억하는 '그 순간의 공기'와 '온도',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을 거친 색면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꽃은 그저 매개체일 뿐, 작가가 진짜 그리고 싶었던 것은 그 대상에 서려 있는 자기 내면이었다.
작품 <경계면>. 굵은 색면과 꽃의 형태가 서로 응축되며 감정의 밀도를 보여준다. 내면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맺히는 정서를 색채의 충돌과 조화로 표현했다.
작품 <잔향>. 작가는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그리지만, 강렬한 원색 대비를 통해 그 안에 담긴 기억의 온도를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감상 포인트는 단연 '재료 물성'과 '질감'이다. 권준옥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두껍게 쌓아 올리는 임파스토 기법과 나이프나 도구를 이용해 표면을 긁어내는(Scraping)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긁혀 나간 틈새로 밑색이 배어 나오는데, 이는 마치 잊힌 기억이 흙 속에서 발굴되듯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권준옥 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대형 작품에서 작가의 열정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또한 <사라지기 전>이나 <음영>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드리핑(Dripping, 물감을 흘러내리게 하는 기법)'은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아래로 흐르는 비나 눈물처럼 보인다. 멈춰 있는 정물화에 흐르는 시간을 부여해 정적인 화면을 동적인 공간으로 뒤바꾸는 작가만의 무기다. 이는 작가가 언급한 "눈앞의 피어남이 아닌, 이미 스쳐 지나간 궤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핵심 기법이기도 하다.비가 내리는 듯 물감이 흘러내리는 기법을 설명하는 작가의 모습. 멈춰 있는 화폭에 흐르는 시간을 담아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은 작품 가까이 다가가 표면을 관찰하길 권한다. 멀리서 보면 화려한 꽃다발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수없는 붓질과 칼질이 교차한 추상화다. 푸른색 배경의 작품들이 비 오는 날 창밖을 내다보는 듯한 차분한 위로를 건넨다면,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대형 작품들은 용암이 흐르는 듯한 원초적인 생명력을 뿜어낸다.권준옥 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등 다수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탄탄한 실력을 입증해 왔다. 이번 첫 개인전은 그간 그룹전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보여주었던 그의 역량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무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관람객은 작가가 캔버스에 꾹꾹 눌러 담은 기억 조각들을 마주하며, 각자 내면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다시금 꺼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전시는 이번 주 일요일(7일)까지 이어진다. 겨울의 초입, 차가운 바람을 피해 작가가 피워낸 뜨거운 색채의 정원에서 잠시 머물러 보는 것은 어떨까. 작품 속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 내면 깊이 고여 있던 고뇌와 감정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시원한 해방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발현/發現/Emergence》 포스터 전시 정보● 전시명: 발현/發現/Emergence – 권준옥 첫 개인전 ● 기간: 2025년 12월 2일(화)~7일(일) ● 장소: 수원시립북수원전시관 ● 작가: 권준옥 ● 문의: 010-5329-5316, Kwanjunok@gmail.com ![]()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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