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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겨울, 상처를 닦아낸 자리에 '꽃'이 피다
박정일 작가 《내면의 정원》... 캔버스에 쌓인 기억의 지층, 시민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2025-12-17 13:35:13최종 업데이트 : 2025-12-16 17:01:34 작성자 : 시민기자 강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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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체를 한눈에 조망한 파노라마 전경. 박정일 작가의 '내면의 정원'이 관람객을 감싸 안듯 펼쳐져 있어, 전시장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숲처럼 느껴진다. 유난히 춥고 건조한 12월이다.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수원 거리 풍경을 뒤로하고 수원시가족여성회관 문화관 2층으로 들어섰다.전시장 문을 여는 순간, 바깥세상 시린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감지됐다. 따뜻하고 몽환적인 '기억의 숲'. 지난 15일 개막한 박정일 작가 첫번째 개인전 《내면의 정원: 흔적의 기쁨》은 겨울 한복판에서 관람객에게 '이른 봄'을 건네고 있었다. 전시장 측면 모습. 왼쪽 벽면을 따라 전시된 화사한 꽃 그림 연작들이 관람객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이끌며 겨울의 추위를 잊게 하는 따뜻한 봄기운을 전한다. 이번 전시는 화려한 기교보다는 작가 내면 깊은 곳을 응시하는 '침묵의 대화'에 가깝다. 20여 점 작품들은 단순히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작가가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시간 결정체처럼 보였다.특히 인상적인 것은 작품 질감이다. 매끄러운 스마트폰 화면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박정일 캔버스는 거칠고도 섬세한 촉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물감을 두껍게 바르고, 마르기 전에 긁어내고, 다시 덮어버린 흔적들. 그것은 인생 희로애락이 만들어낸 굳은살과 닮았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박정일 작가가 자신의 대표작 <내면의 공간(흔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작품 속 푸른 심연과 작가의 차분한 미소가 어우러져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박정일 작가와 작품에 대해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이야기를 나눴다.[인터뷰 1] 작업의 태도: "그림은 나를 닦아내는 수행(修行)" 작가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행위의 반복'이다. 붓질은 단순한 채색을 넘어선다. 박정일에게 그리기란 무엇일까. Q. 캔버스 표면의 질감이 독특하다. 긁히고 겹쳐진 흔적이 많은데. "나에게 캔버스는 일기장이자 수행터다. 기억을 끄집어내어 만지고, 닦고, 다시 겹쳐 올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살다 보면 아픈 기억도 있고, 그리운 추억도 있지 않나. 그 감정 파편들을 질감으로 남기고, 그 위를 닦아내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마음이 치유됨을 느낀다." Q. '닦아낸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그렇다.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닦아내며 어루만지는 것이다. 리플릿 작가 노트에도 썼듯이 '기억을 만지고 닦아 겹쳐 올린 붓질'이 내 작업의 핵심이다.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안고 가되,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라 보면 된다." [인터뷰 2] 작품 세계: 심연에서 피어난 꽃 전시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읽힌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깊은 울림과, 그 끝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력이다. 박정일_내면의 공간(흔적)_2025_Acrylic on canvas_116.7x72.7cm Q. <내면의 공간(Inner Space)> 연작은 색감이 깊고 푸르다. 중앙의 원형은 무엇을 의미하나."심연, 혹은 우주를 연상시키고 싶었다. 자세히 보면 레이스 자국이나 그물망 같은 일상의 오브제가 남긴 요철이 보일 것이다. 나는 이 거친 표면 위에 금빛 가루를 뿌리고 색을 입혔다. 과거의 아픈 기억조차 닦고 어루만지면 내면의 단단한 행성이 되고, 빛나는 별이 된다는 메시지다." 박정일_기쁨_2025_Acrylic on canvas_72.7x53.0cm Q. 반면 <기쁨(Joy)> 연작은 에너지가 폭발하는 느낌이다."인내 끝에 터트리는 환희의 송가(頌歌)다. <기쁨 2>를 보면 꽃들이 화병이라는 경계를 넘어 화면 밖으로 넘쳐흐른다. 노랑, 분홍, 주홍의 강렬한 색채를 썼다. 잿빛 기억 속에서도 끝내 꽃을 피워내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관람객들이 이 그림을 보며 겨울의 우울함을 날려버렸으면 한다." 은은한 조명 아래 저마다의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들.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작가의 폭넓은 작품 세계와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번 전시가 갖는 또 다른 미덕은 '접근성'이다. 예술은 높은 담장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시민들이 문화센터 강좌를 듣거나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슬리퍼를 신고도 편안하게 들를 수 있는 곳. 수원시가족여성회관이라는 친숙한 공간에 수준 높은 예술이 놓여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만난 60대 시민은 "연말이라 마음이 분주했는데, 그림을 보고 있으니 엉클어진 마음이 정돈되는 기분"이라며 "멀리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동네에서 이런 전시를 볼 수 있어 반갑다"고 했다. 거칠고 두터운 질감(마티에르)이 돋보이는 주요 작품들. (왼쪽부터) 깊고 푸른 심연을 표현한 <내면의 공간> 연작과 생명력 넘치는 붉은 꽃의 환희를 담은 <기쁨> 연작 등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박정일 전시는 '보는' 전시가 아니라 '느끼는' 전시다. 캔버스 위에 쌓인 시간의 지층을 따라가다 보면, 관람객은 어느새 자신 내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올해 마지막 자락, 마음에 빈 공간이 느껴진다면 수원시가족여성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라. 박정일이 가꿔놓은 정원에서 당신만의 꽃 한 송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일 작가 개인전 《내면의 정원: 흔적의 기쁨》리플릿 전시 정보● 전시명: 2025 박정일 4회 개인전 《내면의 정원: 흔적의 기쁨》 ● 기간: 2025년 12월 15일(월) ~ 12월 20일(토) ● 장소: 수원시가족여성회관 문화관 2층 전시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119) ● 관람료: 무료 / 누구나 관람 가능 ● 작가: 박정일 ![]()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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