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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겨울바람 속, 미술관은 가장 뜨거운 작별을 준비한다
수원시립미술관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2026년 1월 11일 종료… 나혜석의 사진첩에서 시작된 ‘마음의 물결’에 합류할 시간
2025-12-31 11:24:26최종 업데이트 : 2025-12-31 01:56:24 작성자 : 시민기자 강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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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수원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 포스터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12월 말, 수원 화성행궁 옆 수원시립미술관은 지금 가장 뜨거운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9월,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며 문을 연 한국근현대미술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이 오는 2026년 1월 11일 종료를 앞두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전시가 끝나면 13인 거장들 작품은 다시 각자 소장처로 흩어지고, 전시 출발점이자 상징이었던 나혜석 사진첩은 수장고 어둠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 "마지막 관람"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다시는 한자리에서 볼 수 없는 '마음의 풍경'들이 그곳에 있다. 이 전시는 보통 '거장전'과는 사뭇 다른 문법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같은 화려한 이름표를 앞세워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어둠 속에 고요히 빛나는 작은 유리 진열장이다. 낮춘 조도, 가라앉은 공기, 그리고 그 안쪽 낡은 책 한 권. 바로 나혜석 유일한 유품인 '사진첩'이다. 어둠 속에 전시된 나혜석 유일한 유품, 사진첩 사진첩을 마주하는 순간, 관람객들의 몸짓은 약속이나 한 듯 달라진다. 대작을 감상할 때처럼 뒷짐을 지고 물러서는 대신, 유리관 가까이 상체를 숙이고 숨을 죽인다. 사진을 "본다"기보다 "읽는다"는 동작에 가깝다. 가죽 표지 낡음, 페이지 가장자리에 번진 세월, 삐뚤빼뚤 오려 붙인 사진들 아래에는 그녀가 만년에 붉은 잉크로 직접 쓴 설명들이 빼곡하다.나혜석의 사진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 관람객들 관람객 발길을 오래 붙잡는 것은 바로 그 글씨들이다. 수전증으로 인해 심하게 흔들린 붉은 필체는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육체적 고통과 고독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행복했던 가족사진과 찬란했던 여행의 한때를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붙이며, 그녀는 무엇을 그토록 붙잡고 싶었을까. 이 공간에서 나혜석은 역사 속 위인이 아니라, 가족을 그리워하며 마지막 기억을 정리하던 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나혜석 아카이브실 너머 정면에 임군홍의 〈가족〉이 보인다. 어둠을 지나면 전시는 서서히 빛으로 전환된다. 나혜석의 사적인 그리움은 이제 시대의 아픔을 건너온 '가족'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아카이브실을 지나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정면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애절한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임군홍의 〈가족〉(1950)이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배운성의 대작 〈가족〉(좌측). 임군홍 작품이 미완의 사랑을 노래한다면, 바로 옆 공간 벽면을 가득 채운 배운성 대작 〈가족〉(1930-35)은 시대의 기록처럼 다가온다. 백영수의 〈모성의 나무〉 연작 속 서로를 꼭 끌어안은 어머니와 아이 모습 또한 겨울날 난로 같은 온기를 전한다. 박래현의 추상 작품 등 거장들의 새로운 시도를 만날 수 있는 전시 공간 전시 후반부, '여정' 섹션는 마음의 방향이 바뀐다. 나혜석에게 여행이 고통을 덜어내기 위한 떠남이었다면, 후배 화가인 천경자와 박래현에게 여행은 낯선 곳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는 치열한 수행이었다.특히 이 공간에서는 낯선 땅에서 마주한 이국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시도했던 과감한 조형적 실험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관람객들은 여유롭게 배치된 작품들 사이를 거닐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려 했던 거장들의 치열한 정신을 마주한다. 그 여정 끝에서 만나는 천경자 대표작 〈여인상〉(1985)은 긴 방황 끝에 도달한 내면의 얼굴처럼 서 있다. 화려한 색채와 꽃무리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눈빛에는 고독과 강인함이 동시에 서려 있다. 천경자의 〈여인상〉(가운데)을 감상하는 관람객 이 전시가 결국 도달하는 곳은 '누가 더 유명한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이 여기까지 왔는가'이다. 관람객들은 서두르지 않고 작품 앞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화면을 응시한다. 단순히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내 마음의 속도를 점검하는 '멈춤'의 시간이다. 전시는 우리에게 "흘러가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한 번은 멈춰보라"고 권한다.수원시립미술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두고 "한 예술가의 사적인 기록에서 출발해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들의 보편적인 감동으로 확장되는 특별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이제 그 감동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단 열흘 남짓이다.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르며 감상하는 관람객들의 모습 유리 진열장 속 붉은 글씨 앞에서 숨을 고르는 순간, 미완의 가족 그림 앞에서 먹먹함을 느끼는 순간, 부유하는 설치 미술 아래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이 모든 것은 도록이나 사진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오직 '현장'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올겨울, 붐비는 세상 소음을 잠시 뒤로하고 미술관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거장들이 남긴 '흐르는 마음'을 새해 첫 감동으로 채우기에, 이 전시만큼 따뜻한 초대도 드물다. 1월 11일, 그 문이 닫히기 전에 당신 마음이 그곳에 잠시 머무르기를 바란다. [관람 안내]
● 전시명: 한국근현대미술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 기간: ~ 2026년 1월 11일(일)까지
● 장소: 수원시립미술관 3·4전시실(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33) ● 관람시간: 동절기(11~1월) 10:00~18:00 (입장마감 17:00) ● 휴관: 매주 월요일 ● 야간개방: 매월 2주 금요일, 마지막 주 수요일 21:00까지 ● 관람료: 성인 4,000원 / 청소년 2,000원 / 어린이 1,000원 ● 문의: 031-5191-3665 (전시장 내 오디오가이드 QR 이용 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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