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무조건 절대 복종한다.
한 편의 시가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연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극단 '아리아리'(대표 곽동근)는 12월 27일 오후 5시, 수원 팔달문화센터 공연장 예당마루홀에서 시극 작품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안겼다.
이번 작품은 신동호 시인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한 시극으로, 시가 품고 있던 정서와 서사가 배우들의 몸짓과 목소리를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됐다. 공연장은 출연자의 가족과 친척, 지인, 친구, 그리고 시민 관객 등 60여 명이 객석을 가득 메우며 따뜻한 관심을 보였다.
작품의 모태가 된 시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삶과 기억을 자식의 시선으로 되짚는 작품이다. 봄나물을 다듬으며 흥얼거리는 어머니의 콧노래, 하얀 찔레꽃에 얹힌 추억,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어머니가 지녔을 그리움과 상실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낸다. 무대 위에서 이 시는 단순한 낭독을 넘어, 한 가족의 역사와 한 시대의 초상으로 확장됐다.
1970년대에는 남아선호사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속을 썩히기만 한다.
연출을 맡은 유병선은 "이 시대의 어머니상이 무엇인지, 자신의 꿈과 삶을 뒤로한 채 부모와 자식을 위해 살아온 모든 어머니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작품 전반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극은 1970년대의 강한 남아선호사상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던 미순은 모든 기대와 사랑이 쏠린 남동생 귀남이(철)와 대비되는 존재다. 미순은 어머니의 소원대로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30년 만에 어머니의 제삿날에 맞춰 고국으로 돌아온다. 제사상을 사이에 두고 남동생 철이와 함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어머니와의 기억을 되짚는 과정은, 개인의 회상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집단적 기억을 건드린다.
오히려 동네 아줌마가 엄마를 위로해 준다.
어머니 역을 맡은 이주화, 엄마 역의 이성희, 아빠 역의 정유헌은 각자의 인물에 깊이를 더하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특히 딸 미순 역을 맡은 구미순과 이경자는 세월의 간극과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표현해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다. 남동생 철 역은 이주화와 김난영이 나눠 맡았는데, 이주화는 시어머니와 남동생이라는 1인 2역을 소화하며 인상적인 변신을 보여주었다. 동네 아줌마 역의 이미경 역시 생활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며 극에 현실감을 더했다.
남매는 엄마의 제삿상 앞에서 엄마 앨범을 보고 엄마를 추억한다.
두 남매는 엄마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누나가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듯 외쳐 부른다.
아마추어 극단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배우들의 연기는 진정성이 돋보였다. 과장되지 않은 감정 표현과 담담한 대사는 오히려 관객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고, 공연이 끝난 뒤 객석 곳곳에서는 조용한 여운과 함께 박수가 이어졌다.
이번 공연의 대본은 출연자들이 직접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의미를 더했다.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기억과 감정이 대사에 스며들며, 작품은 더욱 살아 있는 이야기로 완성됐다. 구미순 출연자는 현직 교원으로, 교육 현장에서의 경험이 인물 해석에 깊이를 더했고, 시인으로 활동 중인 이주화 출연자는 언어와 감정의 결을 무대 위에서 섬세하게 풀어냈다.
공연을 마치고 출연자 7명이 관객 앞에 섰다.
출연자들의 기념사진. 아마추어 극단이지만 이들의 연기는 프로급이다. 뒷줄 맨우측이 연출자 유병선
극단 '아리아리'는 2021년 창단 이후 지역을 기반으로 꾸준한 창작 활동과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아름다운 사인', '세류동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마당쇠전', '산국'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생활연극의 가능성을 확장해 왔으며, 경기연극올림피아드에서 여러 차례 수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도시재생센터와 연계한 연극 수업과 찾아가는 공연은 지역 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공연은 (사)경기도생활연극협회와 수원시도시재생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됐다. 무대 위에서 피었다가 진 꽃처럼, 어머니들의 삶 역시 조용히 스러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은 그 꽃잎 하나하나를 다시 불러내 관객 앞에 놓았다. 그 기억은 연극이 되어, 그리고 공감이 되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