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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이 발로 뛴 30년, 사라지는 역사를 붙잡다
소실된 문화유산을 지키는 보존의 미학, 수원박물관 탁본전
2026-01-05 17:33:54최종 업데이트 : 2026-01-05 17:33:44 작성자 : 시민기자   강남철
전시장의 도입부 전경. 하얀 한지에 떠진 검은 탁본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 흑과 백이 만드는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시장의 도입부 전경. 하얀 한지에 떠진 검은 탁본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 흑과 백이 만드는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하얀 한지 위에 내려앉은 검은 비석들의 숲이 시선을 압도한다. 화려한 미디어 아트나 자극적인 색채 없이, 오직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만으로 천 년 시간을 증언하는 공간이다. 수원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기억을 잇는 그림자, 탁본>은 관람객을 고요한 사색 세계로 안내한다.

이번 전시는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은 경기대학교 사학과 학술동아리 '경기문화연구회'가 그동안 축적해 온 땀의 결실을 선보이는 자리다. 대학생들이 지난 30여 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직접 채탁한 260여 점의 방대한 기록 중,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40여 점이 엄선되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대학 동아리 전시를 넘어, 지역 박물관과 대학이 협력하여 문화유산 가치를 재조명한 모범적인 관학 연계 사례로 꼽힌다.

[사라진 것을 증언하는 유일한 목격자]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된 '낙산사 동종' 탁본. 좌측에 관음상이, 하단에 시주자 명단이 길게 펼쳐져 있어 소실된 원본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된 '낙산사 동종' 탁본. 좌측에 관음상이, 하단에 시주자 명단이 길게 펼쳐져 있어 소실된 원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의 1부인 <새겨진 기억,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 섹션에서 관람객의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는 것은 단연 '낙산사 동종' 탁본이다. 지난 2005년 강원도 양양 산불 당시, 보물 제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은 안타깝게도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녹아내려 영원히 소실되었다.

실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화재 이전에 경기문화연구회원들이 정성스럽게 떠놓은 이 탁본 덕분에 우리는 동종의 유려한 문양과 시주자 명단을 지금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김송희 도슨트가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미륵반가사유상 탁본(왼쪽 족자)과 사천왕상 탁본(오른쪽 액자)을 바라보며 전시를 점검하고 있다.

김송희 도슨트가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미륵반가사유상 탁본(왼쪽 족자)과 사천왕상 탁본(오른쪽 액자)을 바라보며 설명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김송희 도슨트(이번 전시 탑본 준비위원회 위원장)는 "탁본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소실될 위험이 있는 원본의 가치를 종이 위에 붙잡아두는 보존의 기술이자 기억의 언어"라고 힘주어 말했다. 돌과 금속은 비바람에 마모되거나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사라질 수 있지만, 먹을 머금은 한지는 그 형상을 '그림자'처럼 남겨 영원한 기록으로 후대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검은 비석의 숲, 역사를 읽다]
2부 전시 공간 전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탁본들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마치 거대한 비석의 숲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2부 전시 공간 전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탁본들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마치 거대한 비석의 숲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2부 <사람의 흔적, 시대를 읽는 거울> 공간은 마치 거대한 비석의 숲을 거니는 듯한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천장 높이 걸린 대형 족자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글씨들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이곳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당대의 인물과 사회를 읽어내는 공간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수원과 깊은 인연을 맺은 유물들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애끓는 효심이 서린 '지지대비'와, 백성들이 편안하게 건널 수 있도록 만든 다리 '만안교'의 건립 과정을 기록한 '만안교비' 탁본은 수원 화성 축조의 역사적 배경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외에도 추사 김정희의 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의 미학을 엿볼 수 있는 탁본과, 고구려와 신라의 치열했던 영토 확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충주 고구려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등 교과서 속 중요 문화유산이 눈앞에 실물 크기로 펼쳐진다.

[수미산의 세계를 구현한 큐레이션]
3부 전시장 중앙에 'ㄷ'자 형태로 배치된 대형 진열장.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을 공간적으로 형상화하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3부 전시장 중앙에 'ㄷ'자 형태로 배치된 대형 진열장.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을 공간적으로 형상화하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전시의 백미는 3부 <마음의 조각, 깨달음을 새기다>이다. 이곳의 공간 연출은 기획자 세심한 의도가 돋보인다. 전시장 중앙에 'ㄷ'자 형태로 배치된 대형 유리 진열장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상의 중심이라 일컫는 '수미산'을 형상화했다.

수미산을 호위하듯 나란히 걸린 사천왕상 탁본 4점. 역동적인 자세와 화려한 갑옷 문양이 흑백의 대비를 통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수미산을 호위하듯 나란히 걸린 사천왕상 탁본 4점. 역동적인 자세와 화려한 갑옷 문양이 흑백의 대비를 통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가장 높은 중앙에는 미륵보살과 비천상이 자리하여 불교의 이상향을 보여주고, 그 주위를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배치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종교적 경외감마저 들게 한다. 각각의 사천왕상은 부릅뜬 눈과 역동적인 자세로 악귀를 밟고 서 있어, 탁본 특유의 흑백 대비를 통해 그 위엄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육안을 넘어서는 탁본의 미학]
김송희 도슨트가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탁본 옆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문양이 탁본을 통해 드러남을 설명한다.

김송희 도슨트가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탁본 옆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문양이 탁본을 통해 드러남을 설명한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은 국보인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탁본이다. 김송희 도슨트는 이 작품 앞에서 탁본만이 가진 특별한 가치인 '가시성'을 강조했다.

"실제 종을 육안으로 볼 때는 금속 표면의 빛 반사나 세월의 마모 때문에 문양이 흐릿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탁본을 뜨면 요철이 분명해지면서 옷자락의 섬세한 떨림이나 구름의 흐름 같은 디테일이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카메라 렌즈조차 담아내기 힘든, 오직 탁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학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현재의 손길]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나오는 길, 탁본들이 걸린 전시장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나오는 길, 탁본들이 걸린 전시장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전시는 "누군가는 새겼고, 누군가는 기도했고, 누군가는 기록했다"는 에필로그로 마무리된다. 수천 년 전 석공이 돌에 새긴 간절한 염원은, 오늘날 젊은 연구자들의 손길을 거쳐 탁본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이제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관람객과 만나 미래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화려한 미디어 아트와 디지털 기술이 넘쳐나는 시대에, 묵묵히 종이와 먹으로 역사를 기록해 온 아날로그적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겨울방학을 맞아 박물관을 찾은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기록의 위대함을 전하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흑과 백의 대비가 돋보이는 이번 전시의 공식 포스터.

흑과 백의 대비가 돋보이는 이번 전시의 공식 포스터.


경기문화연구회 창립 40주년 기념 특별전 《기억을 잇는 그림자, 탁본》

○ 기간 : 2025년 12월 19일(금) ~ 2026년 1월 11일(일) 10:00~18:00(17:00까지 입장)
○ 휴무 : 매주 월요일
○ 장소 : 수원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
○ 요금 : 어린이·65세이상 무료,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성인 2,000원, 단체(20명이상) 50% 할인
         (카카오톡 이벤트 참여로 무료입장 가능)
○ 예약 : 자유 관람
○ 해설 : 사전 문의
○ 내용 : 대학생들이 30여 년간 직접 뜬 탁본으로 사라진 역사를 되살려낸 수원박물관 특별전
○ 대상 : 전체 관람
○ 주최 주관 : 경기문화연구회, 수원박물관
○ 주차 : 수원박물관 주차장 
○ 문의 : 031-5191-4140 (수원박물관 학예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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