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에도 수원화성 모니터링은 계속된다
화성연구회, 수원화성 성신사, 남포루 모니터링
2026-01-08 09:52:08최종 업데이트 : 2026-01-08 09:52:04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
|
수원화성 성신사 지난 6일 오후 화성연구회 분과위원회는 2026년 첫 번째로 수원화성을 모니터링 했다. 첫 모니터링은 수원화성 성신사(城神祠)에서 시작하는 게 관례로 정착했는데, 수원화성 축성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수원화성을 지켜줄 화성 성신께 고유제를 지낸 것처럼 성신사에서 화성 성신께 모니터링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보고하고 기원하기 위함이다. 간단하게 서서 국궁 4배를 한 후 성신사의 내력에 대해 알아봤다. 수원화성 성신사는 수원화성 축성이 마무리되어가던 1796년 7월 11일 터를 닦기 시작해 9월 19일 '화성성신지주'라는 위패를 봉안하고 고유제를 지냈다. 이후 왕명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 맹삭(음력 1월, 7월 초 하루, 혹은 그 달의 좋은 날)에 고유제를 지내게 했다. 수원화성 성신사, 위패가 모셔져있는 공간 성신사 고유제는 일제에 의해 성신사가 파괴되기 전인 1900년 초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집을 잃은 성신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10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일제 강점기에 팔달산에 둘레길이 생기면서 성신사터는 땅 깊숙이 묻혔고 해방 후에도 유원지로 변하면서 성신사는 우리 뇌리에서 사라져갔고 1972년 성신사터 옆에 강감찬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2002년 1월 화성연구회 주관으로 성신사 복원 기원 고유제가 열렸다. 이러한 기원은 들불처럼 번져 2009년 성신사가 복원되기에 이르러 집을 잃고 떠돌던 화성 성신을 다시 모시게 되었다. 북원 당시의 위패는 '화성성신신위(華城城神神位)'였는데 2018년 필자의 고증을 바탕으로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라는 원래의 문구를 되찾아 새롭게 위패를 제작했다. 위패 글씨는 양택동 선생이 썼고 김충영 전 화성연구회 이사장이 각을 했다. 성신사 안에는 CCTV가 있어 전기 배선이 있는데 배선 위에 먼지가 쌓였고, CCTV 주변에 거미줄이 많아 청소가 필요해 보인다. 청소를 소홀히 하면 자칫 화재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관계기관에서는 신경을 썼으면 한다. 수원화성 남포루 성신사에서 둘레길을 따라 남포루로 가는 길가에는 축대를 새로 쌓았는데 성벽형태의 돌쌓기 방식이 조잡하고 기이해 보였다. 수평과 세로선을 맞추지 못해 작은 돌을 여러 개씩 고였다. 수원화성 성벽과 비교해보면 너무도 허접해 보였다. "어쩌면 물 빠짐을 쉽게 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쌓았는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면서도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남포루는 수원화성에 있는 5개의 포루(砲樓) 중 원형과 비슷하게 복원된 건축물이다. 5개의 포루는 구조가 모두 똑같고 성의 몸체에 凸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집을 지었는데, 높이는 포(舖)와 같다. 3층으로 하여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다.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고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쏘게 하였다. 지대석 위에 대포 혈석 8개, 중간에 총혈 15개, 위쪽에 총안 15개, 맨 위에도 전안을 뚫어 수원화성 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무장한 시설이 포루이다. 수원화성 남포루 "5개의 포루는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무너져 원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진 몇 점이 남아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는 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 도설과도 일치하지 않아 많은 의문점이 있고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남포루, 서포루, 북서포루, 북동포루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후의 사진이 있어 원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는데 총혈과 총안의 숫자와 위치 복원에 오류가 있습니다. 여기 남포루를 비롯해 서포루, 동포루는 우진각 지붕인데,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밖은 우진각, 안쪽은 맞배지붕으로 특이한 형태입니다. 이는 1970년대 복원 당시에 목수들이 화성성역의궤 재용편에서 건축물에 사용한 목재의 명칭을 바탕으로 이렇게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에는 추녀 2개, 박공 2개가 사용되었고 다른 포루에는 추녀 4개가 사용되었습니다. 1906년에 방화수류정과 북동포루를 찍은 사진이 있는데 사진 속의 북동포루는 밖은 우진각, 안쪽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습니다." 최근에 보수한 남쪽 성벽 남포루 벽돌은 표면이 떨어져 나가 붉은색 벽돌이 드러났고, 하부의 석재에도 균열과 뒤틀림 현상이 보였다. 모니터링이 필요해 보인다. 남포루 모니터링 후 성 밖에서 성벽을 관찰하며 용도, 화양루를 돌아 성안으로 들어왔다. 성벽을 따라 내려와 최근에 해체, 복원한 남쪽의 성벽을 모니터링 했다. 기울어졌던 여장은 그대로이고 성 밖의 성 돌은 주변의 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듯 보였다. 복원, 보수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 연관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