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수원역 환승센터 '근대 수원 100년' 사진 전시
사진으로 살펴보는 수원의 역사
2026-03-03 17:06:52최종 업데이트 : 2026-03-03 17:06:51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수원역 환승센터 '근대수원 100년' 사진전시

수원역 환승센터 '근대수원 100년' 사진전시


수원역 환승센터에는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 서울, 분당 등으로 왕래하는 버스 승객들을 위한 난방시설이 설치된 대기실 A, B, C  등 3개동이 있다. 그 중 B동 대기실에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거쳐 1980년대까지 연대별 '근대수원 100년'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팔달문을 비롯해 화홍문, 우시장, 수원 길거리, 수원역 등의 사진은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수원의 근대역사(近代歷史)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팔달문(八達門)은 조선왕조 22대 정조 임금이 1794년 (정조 18년) 정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 묘소를 양주 땅 배봉산에서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수원에 행궁을 짓고 적의 공격을 방어할 화성(華城)을 쌓고 동서남북 4대 문 중 하나다.

 

팔달문은 화강암으로 된 석축에 홍예문(虹霓門)을 내고 그 위에 여장(女墙)을 돌리고 2층 누각(樓閣)을 세웠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이며 우진각 지붕의 건물이다. 아래층과 위층의 공포(攻砲)는 다포식(多砲式)이며 정문의 좌우에는 적대(適臺)를 설치하여 적(適)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문의 명칭은 화성 중심부에 있는 팔달산을 딴 것이며 남쪽 방향에 있어 일명 남문(南門)이라고도 한다. 1964년 보물 402호로 지정되었다.
 

팔달문과 상가들의 모습

팔달문과 상가들의 모습


화홍문(華虹門)은 무지개 모양의 7개의 석조 아치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문루가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수원 시내를 흐르는 광교천이 여름철 장마에 자주 범람하여 1796년(정조 20년) 화성을 축 조하면서 수원천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남북에 각각 수문을 설치하였다. 북쪽 상류에 있는 수문은 북수문(北水門)이라고 한다. 화홍문은 수원팔경의 하나다.
 

화홍문 누각에서 장마철 물구경을하는 시민들

화홍문 누각에서 장마철 물구경을하는 시민들


수원은 전국 3대 우시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漢陽서울) 도성 안에는 도축을 금지했다. 그로인해 한양에는 우시장이 서지를 못했다. 그에 따라 한양 남쪽인 수원에 우시장이 서게 됐다. 정조가 행궁과 화성을 축조하면서 건축 자재 운반을 위해 구르마와 소를 동원하여 공사를 마치고 그 소들을 농민들에게 나눠주면서 수원에 우시장이 생겼다.

 

1920년대 에는 수원 우시장에 출하된 소가 무려 2만여두로 함경도 명천과 길주 등과 함께 3 대 우시장으로 꼽혔다. 오늘날까지 수원갈비가 명성을 떨치는 데는 바로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수원시 우시장 모습

일제강점기 수원시 우시장 모습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수원의 모습

수원은 광활한 평야가 펼쳐 저 있어 농산물 집산지가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농산물을 운송할 도로 개설과 함께 철로가 부설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산과 들을 가로질러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폭넓은 도로를 개설했다. 조선후기까지 사람들이 다니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소로(小路) 길을 다니다가 일제강점기에 개설한 '새로운 길'이라는 뜻으로 신작로(新作路)라고 하였다.

1929년 수원시내 1등도로

1929년 일제강점기 수원시내 1등도로 신작로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1905년 1월 1일 개통되었다. 이에 따라 수원에 역사(驛舍)가 신축되어 120여 년의 역사(歷史)와 함께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 요충지가 되었다.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역사도 수차에 걸쳐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1928년 수원화성(華城)의 관광 활성화를 위해 기존 역사를 철거하고 조선의 전통 가옥인 한옥 기와지붕으로 새 역사를 지어 30여 년간 업무를 보던 역사가 소실된 후 1961년 현대식 건물로 새 역사를 지었다. 
 

1

1928년 건축된 한옥 양식으로 지은 수원역사


1950년대~1960년대 수원의 모습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1년 반 정부가 채 자리도 잡기전 조선 인민군이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남한에 100여만 명의 인명피해를 냈고 국토가 폐허 되었다. 1950년대는 우리 민족의 고통과 뼈 아픈 역사를 간직한 시대였다.
 

6,25 전쟁으로 발생한 수원시 세류동 난민촌 모습

6.25 전쟁으로 발생한 수원시 세류동 난민촌 모습

 

1960년대 수원시 인구는 4만여 명이었다. 시민들의 행정을 보는 수원 시청은 지금의 종로 후생병원자리에 있었는데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손실되었다. 휴전 후 교동에 있는 수원법원과 검찰청(1952~1956년)이 사용하던 건물을 임시 청사로 사용하다가 1964년 교동 74-1 부지를 매입 새 청사를 신축(1966년 7,26 준공) 1987년 중반까지 20여 년간 수원시 청사로 사용하다가 현재의 새 청사로 이전했다.


1960~1980년대까지 수원시청 모습(현 가족여성회관)

1960~1980년대 수원시청 본관 모습(현 가족여성회관)

1970년대~1980년대 수원역 거리의 모습

사진 상 1971년 수원역앞 거리의 모습   사진 하  1987년 발전된 수원역앞 거리의 모습

사진 상 1971년 수원역앞 거리의 모습 사진 하 1987년 발전된 수원역앞 거리의 모습


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수원시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교통의 발달로 외지인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역사도 변화를 가져왔다. 2003년 2월 민자유치로 신축한 건물이 현재의 수원역사다. 웅장한 건물과 대규모 쇼핑공간(AK플라자)을 갖춘 현대식 수원역에는 KTX를 비롯한 모든 열차가 정차한다. 수도권 전철 1호선과 분당선의 환승역이다.  2017년 수원역 환승센터가 준공되면서 명실 상부한 수도권의 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 민자유치로 신축한 현재의 수원역사

교통 요충지로 자리메김한 현재의 수원역사


'근대수원 100년' 을 살펴보는 60대로 보이는 화성시에 사는 한 남성 승객 분에게 사진을 살펴본 소감을 물어봤다 "수원시와 화성시는 접경지역으로 한 생활권이라 자주 오고 가면서 현재의 발전된 수원의 모습만을 보았는데 전시된 사진을 보고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원시 발전 과정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라고 한다.

 

사진이나 기록물은 한 시대의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로 그 시대의 정부 정책이나 발전괴정, 국민들의 삶의 문화를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수원특례시의 모습은 100년 후 후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차봉규님의 네임카드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