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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대서사극, 우리 소리 배를 타고 화성행궁에 닻을 내리다
서양 고전을 우리 소리로 풀어낸 실험… 외지 관객 발걸음 속에 전통의 과제도 남겨
2026-03-30 17:12:47최종 업데이트 : 2026-03-30 17:12:45 작성자 : 시민기자   강남철
수원행궁 옆 정조테마공연장 일대 모습

수원화성행궁 옆 정조테마공연장 일대 모습


행궁동 골목에 늦은 오후의 빛이 머물 무렵, 정조테마공연장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수원화성행궁 곁 한옥 공연장에 오른 작품은 창작 판소리 '구구선 사람들'이었다. 오래된 성곽과 한옥 지붕이 어우러진 자리에서 서양 고전이 우리 소리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공연장은 낯섦과 호기심이 맞물리는 공간이 됐다.

지난 28일 열린 이 공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6 공연예술 지역 유통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빅토르 위고의 고전 『레 미제라블』을 바탕으로 했지만, 익숙한 줄거리만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장발장 한 사람의 삶보다, 팡틴·마리우스·가브로슈 같은 인물의 처지와 시선을 앞세워 이야기를 새로 짰다.

이 작품은 세 편의 토막 소리를 하나로 엮어 긴 흐름을 만든다. 서양 고전을 판소리 형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전통예술을 오래 접한 관객에게도, 판소리를 처음 보는 관객에게도 한 번쯤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무대다. 판소리가 익숙한 옛이야기만 다루는 장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했다.

정조테마공연장 내부에 마련된 판소리 레미제라블 '구구선 사람들' 포토존

정조테마공연장 내부에 마련된 판소리 레미제라블 '구구선 사람들' 포토존


정조테마공연장은 공연만 보고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장소다. 화성행궁과 행궁동, 박물관과 미술관이 가까워 공연 관람이 곧 수원의 역사 문화 산책으로 이어진다. 이날 공연장에는 수원 시민뿐 아니라 안산, 안양, 서울에서 온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한 편의 공연이 도시를 찾는 이유가 되고, 도시의 풍경이 다시 공연의 기억을 넓혀주는 모습이었다.

공연 시작을 앞두고 객석을 채우는 관객들

공연 시작을 앞두고 객석을 채우는 관객들


안산에서 온 백민준 씨는 평소에도 수원을 자주 방문한다며, 화성행궁과 미술관, 박물관이 모여 있어 문화 환경이 잘 갖춰진 도시라는 인상이 있다고 전했다. 판소리는 처음이지만, 어떤 예술인지 직접 보고 싶어 왔다고도 했다. 처음 접하는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공연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반응이었다.

안양에서 온 이예빈 씨는 지인 추천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평소 행궁동 카페거리는 자주 왔지만, 주변 문화공간까지 둘러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출연진 수는 많지 않았지만, 무대를 채우는 힘이 느껴졌고,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극장 규모의 공연이라도 배우와 소리꾼의 에너지가 객석까지 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반응이었다.

서울에서 온 양찬혁 씨는 인터넷에서 공연 정보를 보고 처음 수원을 찾았다. 그는 춘향전이나 심청전처럼 익숙한 소재가 아니라, 서양 고전을 판소리로 풀어낸 점이 신선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관객이 판소리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무대처럼 느껴졌다는 반응도 내놨다. 수원화성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공연을 보러 왔다가 도시의 첫인상까지 함께 품고 돌아간 셈이다.

공연 시작 전 조명이 비춘 정조테마공연장 무대

공연 시작 전 조명이 비춘 정조테마공연장 무대


이날 공연은 작품 자체뿐 아니라 정조테마공연장의 가능성도 다시 보여줬다.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수원의 거리와 문화공간, 역사 자원을 함께 경험했다는 점에서다. 공연장 하나가 도시의 문화 인상을 넓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조테마공연장이 단순히 공연이 열리는 곳을 넘어, 수원 문화의 입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했다.

배우들이 관객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배우들이 관객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무엇보다 '구구선 사람들'은 왜 한 번쯤 볼만한가 하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주는 작품이다. 서양 고전과 판소리라는 쉽게 겹치지 않을 것 같은 두 세계를 무대 위에서 마주치게 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작품을 전혀 다른 형식으로 만나는 재미가 있고, 판소리라는 장르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흥미도 있다. 전통예술에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입문 무대가 될 수도 있다.

관람객들이 고객만족도 조사에 참여한 뒤 기념품을 받고 있다

관람객들이 고객만족도 조사에 참여한 뒤 기념품을 받고 있다


다만 아쉬움도 남는다. 서양 고전을 판소리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설명해야 할 이야기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신명, 관객과 바로 호흡하는 맛이 옅어질 수 있다. 새로운 시도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전통 판소리의 깊은 맛과 즉흥적인 호흡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여지도 있었다.

이 점은 작품의 실패라기보다, 창작 판소리가 앞으로 더 다듬어야 할 숙제에 가깝다. 낯선 이야기를 끌어오는 힘과 판소리 본래의 생동감을 어떻게 함께 살릴 것인지가 관건이다. 전통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으면서도, 전통이 가진 매력을 놓치지 않는 균형이 더 중요해 보인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정조테마공연장 입구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정조테마공연장 입구


한편, 이날 만난 관객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앱, 인터넷 검색, 지인 추천을 통해 공연을 알게 됐다고 했다. 정조테마공연장에서 열리는 우수 공연이 수원 시민에게도 더 쉽고 넓게 닿도록, 안내와 홍보를 한층 촘촘히 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좋은 공연이 외지 관객에게만 먼저 알려지는 일은 아쉬운 대목이다. 시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무대를 제때 알고 찾을 수 있어야 공연장의 역할도 더 커질 수 있다.

정조테마공연장에서 만난 '구구선 사람들'은 모두에게 같은 감상을 남기는 무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통과 현대, 서양 고전과 우리 소리를 한자리에 올려놓았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낯설지만 한 번쯤 마주해볼 만한 공연, 그리고 그 실험을 품어낸 수원의 문화공간. 이번 무대는 그 두 가지를 함께 보여줬다.

정조테마공연장 2026 상반기 기획공연 안내 포스터

정조테마공연장 2026 상반기 기획공연 안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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