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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과 다른 점은?" 문화유산 비교 답사는 즐거워
(사)화성연구회 모니터링 활동
2026-04-17 14:17:17최종 업데이트 : 2026-04-17 14:17:16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충청북도 단양에 있는 적성산성

충청북도 단양에 있는 적성산성


(사)화성연구회 모니터링위원회는 매월 정기적으로 수원화성을 답사하면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데, 일 년 중 몇 차례는 비교 답사를 한다. 비교 답사란 수원화성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나라의 산성이나 읍성, 관련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것이다. 성곽 시설물, 성제 등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비교해보면 수원화성의 가치와 성제의 역사적 근원을 찾을 수 있고, 우리나라 성곽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곽을 답사하면서 주변의 문화유산도 함께 답사해 유산을 보는 안목을 키우기도 한다.

4월 모니터링은 지난 14일 충청북도 단양의 '적성산성', 충주의 '탑평리 7층 석탑', '충주 고구려비'를 답사했다. 적성산성은 단양군 단성면에 있는 신라 산성으로 신라가 충주 지역을 점령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성되었다. 1978년 성안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다. 적성비는 신라가 고구려 영토인 적성을 점령한 후 세운 비석이다. 비석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성비 기록을 통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충청북도 단양에 있는 적성산성, 산성 뒤로 남한강이 보인다.

충청북도 단양에 있는 적성산성, 산성 뒤로 남한강이 보인다.

 
적성산성은 소백산맥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동서로 긴 타원형으로 성을 쌓았다.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며 협축으로 축성했다. 동쪽은 죽령천, 서쪽은 단양천이 북쪽으로 남한강에 합류해 3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자연 해자를 이루는 요새 중의 요새이다. 이 당시에 축성한 신라 산성은 완성도가 높고 축성법이 견고해 신라의 축성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적성산성은 남쪽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언덕 위에 적성비가 있고 남문 주변부터 북문 주변까지 성벽이 있다. 북문은 신라 특유의 성제인 현문식이다. 수원화성의 4대문이나 전국의 읍성의 대문은 평지에 있어 성안으로 들어가기가 쉽다. 출입이 쉽다는 것은 적군이 쳐들어올 때 방어가 쉽지 않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현문식이란 문이 평지에 있지 않고 성벽 중간에 있어 사다리 등을 올라야만 성벽을 통과할 수 있는 문이다. 성안 출입이 불편한 만큼 적군이 쳐들어올 때는 방어가 쉬운 구조이다.

충청북도 단양에 있는 적성산성, 현문식 성문

충청북도 단양에 있는 적성산성, 현문식 성문

수원화성 팔달문, 신라 산성의 현문과 달리 평지에 문이 있어 출입이 쉽다. 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쌓았다.

수원화성 팔달문, 신라 산성의 현문과 달리 평지에 문이 있어 출입이 쉽다. 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쌓았다.


적성산성 주변 남한강 상류에는 고성리산성, 정양산성, 대야산성, 온달산성이 있고, 하류에는 충주산성, 여주 파사산성 등이 있는데 6세기 중반 이후 축성한 것이다. 고구려와 남한강을 국경으로 했기 때문에 신라 산성은 남한강 남쪽에 축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신라 산성에 올라가면 강 건너 북쪽을 조망하기에 좋은 전략적 위치임을 알 수 있다.

'탑평리 7층 석탑'은 중원문화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신라 석탑 중 유일한 7층 석탑이다. 통일신라기인 9세기 전후에 세워졌는데, 우리나라의 중앙에 있어 중앙탑이라고도 한다. 탑의 높이가 13m에 이를 정도로 높아 좁은 너비에 비해 가늘게 치솟은 느낌이 강해 안정감보다는 상승감이 두드러진 탑이다. 

적성산성 안에 있는 적성비

적성산성 안에 있는 적성비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충주시 입석마을에서 발견되었다. 1500년의 잠에서 깨어나 고구려와 중원지역의 비밀을 풀어준 우리나라 현대사의 기념비적인 비석이다.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구려가 충북지방과 영남지방까지 세력이 미쳤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중원지역은 고대사의 공백 지대였다.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됨으로써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결정적 유물이 되었고 고구려가 중원지역을 점령했던 5세기 초에서 6세기 중반까지 신라와의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로 불러 고구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고 신라왕을 매금(寐錦)으로 표현했는데 광개토태왕비에도 매금이라 했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의하면 고구려는 400년 전후에 이미 중원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충주에 있는 탑평리 7층 석탑

충주에 있는 탑평리 7층 석탑


충주 고구려비는 최근에 최신의 과학적 판독(3D 스캔, RTI 촬영 등)으로 '영락 7년 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글자가 제액(비문의 첫머리)에서 판독되었다. 영락 7년은 광개토태왕의 연호로 397년(정유년)이다. 이로 인해 장수왕 시기에 건립되었다는 학설보다는, 광개토태왕 시기에 비석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해졌다. 광개토태왕 비문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해 고구려가 언제 충주 지역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적성산성을 처음 답사했다는 회원은 "이번 모니터링을 통해 신라 산성의 특징인 현문, 보축 성벽 등 성벽의 구조를 알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이론으로만 알다가 산성에 올라와 보니 산성의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이 한눈에 보이네요."고 전했다.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또 다른 회원은 "수원화성 성벽은 단면을 볼 수 없어 성벽의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적성산성에서 보니 성벽의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화유산 비교 답사를 자주 다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사실을 답사를 통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수원화성을 모니터링 하면서 공부한 사실을 다른 성곽을 보면 눈에 들어온다. 현장에 가면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아 답사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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