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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연극축제 거리극 ‘뉘앙스’, 말보다 깊은 몸짓으로 관객 사로잡다
한불 수교 140주년, 언어를 넘어선 두 예술가의 조용한 대화가 선과 움직임으로 피어난 무대
2026-05-17 22:20:19최종 업데이트 : 2026-05-17 22:20:18 작성자 : 시민기자 이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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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그대로 무대가 된 공연장. 수많은 관람객들이 함께 했다. 지난 16일 오후, 경기상상캠퍼스 '교육1964 뒤편' 공간.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숲길 옆 빈터에는 삼삼오오 관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 돗자리를 펼친 가족 관객, 카메라를 든 연극 애호가들까지 자연스럽게 반원을 만들며 공연을 기다렸다. 무대라기보다 잠시 비워둔 도시의 한 귀퉁이 같은 공간. 그 벽 앞에 파란 작업복을 입은 두 남자가 무심한 듯 등장하면서 거리극 '뉘앙스(NUANCES)'는 조용히 시작됐다.
2026 수원연극축제 공식 초청작인 '뉘앙스'는 프랑스 공연단체 '데프락토'와 한국 창작집단 '무언가'가 공동 제작한 한·프 국제 협업 프로젝트다. 올해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 '프랑스 포커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된 작품으로, 언어 대신 몸짓과 선, 움직임만으로 관계와 감정을 풀어낸 비언어 거리극이다.
두 배우와 김시진 PD가 직접 관객들을 맞이하며 공연 장소를 안내하고 있다. 도시의 벽, 하나의 무대가 되다 공연은 도시의 벽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작업자의 작은 충돌에서 출발한다. 배우들은 페인트 롤러와 테이프, 몸짓만으로 공간을 채워나갔다. 처음에는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선을 덧그리고 지우며 부딪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움직임은 하나의 리듬처럼 맞물리기 시작했다.
특히 바닥에 이어진 파란 선 하나가 벽으로 이어지고, 다시 배우의 몸짓으로 연결되는 순간마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이들은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몸동작에 깔깔 웃었고, 어른들은 침묵 속에서 미묘하게 변하는 감정선을 따라갔다.
우석훈과 기욤 막띠네가 몸짓과 움직임만으로 호흡을 맞추며 열연을 펼치고 있다. 영통에서 왔다는 한 관람객은 "처음엔 아이들이 좋아할 단순 퍼포먼스인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사람 사이 관계를 이야기하는 작품 같았다"며 "말이 없는데도 감정이 전달되는 게 신기했다"고 말했다. 옆에서 공연을 보던 한 중년 관객 역시 "선을 긋는 과정 자체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며 "요즘처럼 말은 많은데 소통은 어려운 시대에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고 전했다. 광교에서 공연을 보러 온 다혜네 가족이 사진 촬영 요청에 환한 미소와 함께 브이(V) 포즈를 취하고 있다. 웃음과 침묵 사이, 몸짓이 만든 언어 '뉘앙스'의 가장 큰 힘은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대사 한마디 없이 이어지는 40분 남짓한 공연이지만 관객들의 몰입은 오히려 더 깊었다. 한 배우가 어렵게 이어놓은 선을 다른 배우가 무심코 망가뜨리는 장면에서는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서로 엇갈리던 움직임이 어느 순간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는 객석 전체가 숨을 죽였다.
공연은 클라운(광대) 연기와 라이브 드로잉, 신체 퍼포먼스가 절묘하게 결합된 형태였다. 벽을 오가고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즉흥적으로 선을 완성해가는 장면에서는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긴장감마저 흘렀다. 무엇보다 자연 자체가 무대가 되면서 관객들 또한 공연의 일부처럼 녹아들었다. 바람 소리와 아이들 웃음, 숲의 공기까지 작품 속 요소가 되는 순간이었다.
언어를 넘어선 한·프 협업의 의미 이번 작품은 단순한 국제 교류 공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연 제작을 맡은 김시진 PD는 인터뷰를 통해 "프랑스 예술가 기욤과 한국의 드로잉 클라운 예술가 우석훈을 연결하면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세 차례 창작 레지던스를 진행했고, 이번 무대가 세계 최초 초연"이라며 "무엇보다 두 배우가 서로의 언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몸짓과 감각만으로 소통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배우는 프랑스어를, 프랑스 배우는 한국어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해 김 PD가 통역과 제작을 동시에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배우들은 굳이 말을 통하지 않아도 몸짓만으로 호흡을 맞춰갔다.
김 PD는 "처음에는 서로 번역을 요청하던 배우들이 어느 순간 몸짓과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며 "그 장면이야말로 이 작품의 본질이었다"고 말했다.
가장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공연 공연이 끝난 뒤 벽에는 파란 선과 흔적만 남았다. 그러나 관객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이들은 배우들이 남긴 선을 따라 걸었고, 몇몇 관객들은 완성된 벽 앞에서 한참 동안 사진을 찍으며 여운을 즐겼다.
아이들은 공연 후 배우들과 사진도 찍고 여운을 즐겼다.
공연 후 한 관람객은 "처음에는 단순한 퍼포먼스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사람 사이의 이해와 화해를 표현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며 "프랑스식 감성과 한국적 정서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 색달랐다"고 말했다.
공연 후 감독 및 배우, 음악 연출자도 무대에 올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도시의 벽 앞에서 시작된 작은 선 하나가 결국 한국과 프랑스, 그리고 관객들의 마음까지 조용히 연결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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