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관의 여름 쉼터 전경
지난 7월 30일, 수원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무더위가 이어지는 여름방학에는 시원하게 쉬면서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더욱 반갑다. 수원에는 미술관과 갤러리, 도서관, 수원수목원(일월·영흥), 박물관, 행정복지센터, 노인복지관, 경로당 등 다양한 여름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취향과 가까운 거리에 맞춰 이용하면 좋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는 소장품전《블랑 블랙 파노라마》가 제1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지난 2월 12일부터 2027년 3월 1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는 고산금, 김두진, 김수철, 김유정, 박미라, 석철주, 유승호, 유혜숙, 윤세열, 이동재, 이배, 이수경, 이순종, 이여운, 장혜홍, 최병소, 최수환, 최필규 등 18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회화·조각·설치·영상 등 2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블랑 블랙 파노라마', 흑백의 전시장 전경
《블랑 블랙 파노라마》는 흑과 백이라는 두 축에서 출발한다. 전시 제목인 프랑스어 '블랑(blanc)'과 영어 '블랙(black)'은 모두 빛이나 불, 연소와 관련된 어원에서 비롯되었으며, '빛나다(to shine)'와 '타다(to burn)'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시는 흑과 백, 밝음과 어둠, 드러남과 감춰짐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단순히 색의 대비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숯, 목탄, 먹, 흑연, 그을음, 도자기 파편, 신문, LED 등 다양한 재료가 만들어내는 질감과 제작 과정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작품은 이배 작가의 〈불에서부터〉이다. 캔버스 위에 숯을 직접 붙여 제작한 작품으로, 조명의 방향에 따라 표면의 질감과 깊이가 달라 보인다. 불이 타오르며 하얗게 빛나던 순간에서 검게 남은 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작품으로, 백과 흑이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기원에서 비롯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빛남과 그을림, 드러남과 감춰짐은 서로 반대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이 배 작가, <불에서 부터> 작품 앞에서 감상 전경
이배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0),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2013),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기사장(2018) 등을 수상했고, 2026년에는 뮤지엄 SAN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유승호 작가의 〈세월아, 돌려다오〉는 노송과 명상에 잠긴 노승의 모습을 통해 시간의 덧없음을 담아낸 작품이다. 작은 문자 하나하나를 화면의 기본 단위로 삼아 이미지를 완성한 작품으로, 쓰기와 그리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표현 방식이 인상적이다.

최수환 작가, 아무도 01없는 <밤﹣바다> 풍경
최수환 작가의 〈밤-바다〉는 고요한 밤바다를 흑과 백으로 표현했다. 검게 보이는 특수 유리판에 미세한 구멍을 촘촘히 뚫고 뒤편에서 LED 조명을 비춰 이미지를 형성하는 작품이다. 어둠 속에서 잔잔히 빛나는 흰 파도는 조용한 밤바다의 정취를 더욱 깊게 전한다.
이수경 작가의 〈번역된 도자기_2019 TW 5〉는 깨진 도자기 조각을 에폭시와 금박으로 이어 새로운 형태로 탄생시킨 작품이다. 상처를 감추기보다 금박으로 더욱 빛나게 표현해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다. 작품 뒤편에는 장혜홍의 〈흑(黑)-블랙 프로젝트 2020〉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흑색 화면 속 용의 형상이 강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김수철 작가의 〈신비로운 직관〉은 안료와 돌가루, 흑연 등을 패널 위에 쌓아 올린 작품이다. 관람자의 위치와 조명의 각도에 따라 표면의 질감과 명암이 달라지며, 채움과 여백, 반복과 축적이 만들어내는 깊이를 경험하게 한다.

김유정 작가, '온기', 자연의 작은 따스함을 전한다
김유정 작가의〈온기〉는 흑백의 풍경 속에서 자연이 지닌 따뜻한 생명력을 표현한다. 거친 화면에는 날카로운 선과 미세한 요철이 드러나고, 벗겨진 흔적 사이로 밝은 층이 나타나면서 자연의 시간과 생명의 온기를 전해준다.
석철주 작가의 〈자연의 기억〉에서는 들풀 사이를 스치는 바람과 이슬, 비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화면 위쪽의 넓은 여백에서는 새벽의 기운이 감돌고, 들풀을 통해 자연의 생명력과 시간의 흐름을 담아냈다.
전시장에서 만난 화서동의 한 중년 부부는 "미술관이 가까워 한 달에 한두 번씩 찾는다. 이번 '블랑 블랙 파노라마' 전시는 흑과 백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작품을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며 오래 머물게 되는 전시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흑과 백을 단순한 색의 대비가 아닌 관계와 과정으로 바라본다. 백은 아직 그을리지 않은 상태이고, 흑은 빛이 지나간 흔적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두 색은 서로를 부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순환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관계임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1관,《블랑 블랙 파노라마》와 2관,《패트리샤 피치니니:킨쉽》, 두 개의 전시를 함께 볼 수 있다.
20여 점의 소장품은 이러한 철학을 다양한 재료와 표현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관람객에게 예술이 지닌 깊은 성찰의 의미를 전한다. 흑과 백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을림, 드러남과 감춰짐의 세계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길어진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전시실에서 예술을 통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특별한 문화 쉼터가 되어준다.
한편 수원시립미술관에서는 제1전시실 《블랑 블랙 파노라마》와 함께 제2전시실 《패트리샤 피치니니: 킨쉽》도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수원시립미술관 행궁본관